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씨앗 독성 때문에 동물이 안 먹어… 야생 번식 힘들죠

입력 : 2022.11.01 03:30

은행나무

/그래픽=유재일
/그래픽=유재일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식물이 은행나무죠. 이 무렵이면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노란색으로 물든 은행나무를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그런데 전국 곳곳 가로수 길에 줄줄이 늘어선 은행나무가 야생에서는 멸종 위기에 몰려 있는 식물이라는 걸 알고 있나요? 은행나무의 특성과 함께 왜 멸종 위기에 처했는지 이유를 알아볼게요.

살아있는 화석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굉장히 독특한 식물이에요. 먼 친척조차 없이 오로지 은행나무 하나만 단독으로 존재하는 식물이거든요. 은행나무는 생물 분류 단계에서 은행나무문(門·Phylum)으로 분류돼요. 은행나무와 다른 식물은 동물로 예를 들면 해파리와 인류의 차이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종류라는 거예요.

은행나무가 이렇게 홀로 존재하는 이유는 고생대에 처음 등장해 중생대를 거쳐 현재까지 살아남은 아주 오래된 생물이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약 3억5000만년 전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돼요. 그래서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living fossil)이라고 부르지요.

지구에 처음 등장했을 당시 은행나무의 모습은 지금과는 좀 달랐어요. 은행나무는 화석으로도 많이 남아 있는데요. 이 화석을 분석해 보면, 초기 은행나무는 소나무처럼 잎이 뾰족한 침엽수였는데 중생대 말부터 지금과 같은 넓은 잎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지요. 잎의 모양이 바뀐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야생 번식 힘든 은행나무

보통 식물은 꽃 하나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있거나 식물 개체 하나에 암꽃과 수꽃이 있어 꽃가루로 수정해 종자를 맺는데요. 은행나무는 이들과 달리 암나무와 수나무가 있습니다. 암나무에서는 암꽃만, 수나무에서는 수꽃만 핍니다. 꽃가루는 바람을 타고 이동해 수분이 되지요. 은행나무 주변을 걷다 발밑에 물컹 밟히는 은행은 바로 암나무에서 열리는 거예요.

은행(銀杏)은 은행나무의 종자(씨앗)입니다. 은행의 쿰쿰한 냄새는 가장 바깥 부분인 종자 껍질이 썩으며 만들어지는 부탄산과 헥산산 때문이에요. 은행은 불에 구웠을 때 특유의 쫄깃한 식감과 독특한 향 때문에 별미로 즐기는 사람이 많은데요. 사실 은행은 먹기에 썩 좋은 음식은 아니랍니다. 은행에 든 독성 물질 때문이죠.

은행에는 추리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청산가리 계열의 아미그달린(amygdalin)이라는 독소가 들어 있어요. 그뿐 아니라 은행 독소(ginkotoxin)라고도 불리는 메틸피리독신(methylpyridoxine)도 있죠. 그런데 아미그달린과 달리 은행 독소는 물에 씻거나 불에 구워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은행을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되죠. 일반적으로 성인은 한 번 먹을 때 10개 정도, 어린이들은 1~2개가 적당하다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과육처럼 보이는 은행 껍질에 들어 있는 은행산이나 빌로볼 같은 점액 성분도 피부를 자극해 염증을 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은행나무는 동물의 도움을 받아 번식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다람쥐는 잘 익은 도토리를 여러 장소에 창고를 만들어 모아둡니다. 일부는 다람쥐가 찾아 먹지만, 그러지 않은 도토리는 그곳에서 싹을 틔워 도토리나무로 자라게 됩니다. 도토리를 먹은 곰 같은 야생동물의 배설물에서 나온 씨앗이 자라 도토리나무가 되기도 하죠.

하지만 은행은 냄새가 좋지 않고 독성 물질까지 들어 있어 야생동물이 먹질 않습니다. 식물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종자를 널리 퍼뜨려야 하는데, 작은 유리구슬만 한 은행은 꽤 큰 데다 무거워서 동물의 도움이 없으면 종자를 퍼뜨리기 어렵습니다.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을 타거나 곤충의 날개를 타고 옮겨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죠.

땅에 떨어진 은행 종자는 잘 자라기도 어려워요. 몸집이 큰 엄마 은행나무 바로 아래서 엄마와 생존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햇빛을 듬뿍 받고 자라야 하는데 이미 거대한 엄마 나무가 햇빛을 가로막아 어린 나무의 성장을 막습니다. 아기 나무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대부분은 결국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은행나무는 한번 뿌리를 내리면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장수하는 식물인데요. 하지만 은행을 처음 맺기까지 십수년이 걸린다고 해요. 이처럼 씨앗을 더디게 맺는 것도 종족 번식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가로수로 흔하지만 사실은 멸종위기종

결국 야생 상태에서 은행나무는 종자를 널리 퍼뜨릴 방법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은행나무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하는 멸종위기 생물 중 적색에 해당하는 '위기'종이에요. 우리가 흔히 보는 은행나무는 인위적으로 인간이 심은 것이고, 야생에서는 은행나무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전 세계에서 은행나무 야생 개체 군락지를 볼 수 있는 곳은 중국뿐입니다. 그마저도 완벽하게 야생 개체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이주하면서 은행나무를 가지고 가서 심었고, 그 개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숲을 만든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대신 은행나무는 일단 한번 자리를 잡고 자라기 시작하면 환경 변화 등에도 꿋꿋이 잘 버티는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어요. 군락을 이루기는 어렵지만 곳곳에서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또 인간도 은행나무의 장점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적극적으로 은행나무 종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독특한 부채꼴 형태 잎과 가을이 되면 샛노랗게 물드는 특징 덕분에 오래전부터 정원수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천연기념물 제30호인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11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죠.

은행나무는 인류와 함께 살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식물이랍니다. 대기 오염이 심한 도시에서도 잘 죽지 않고, 나무 껍질이 두꺼워 근처에 불이 나도 잘 옮겨붙지 않지요. 곤충들이 은행잎에 있는 노란색 색소의 일종인 플라보노이드(flavonoids)라는 성분을 싫어하기 때문에 병충해에도 강합니다. 또 공기 중에 돌아다니던 미세 먼지를 넓적한 잎에 흡착시켰다가 빗물에 쓸려 보내는 능력까지 있습니다. 이런 장점 때문에 2020년 기준 서울에서 가로수로 가장 많이 심은 나무가 바로 은행나무랍니다.

오가희 어린이조선일보 편집장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