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전통 설화를 현대 무용과 오페라로 재탄생시켰어요
입력 : 2022.10.31 03:30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 ▲ ①국립오페라단이 지난 3월 창단 60주년을 맞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를 재해석한 오페라 '왕자, 호동'을 공연했어요. ②국립무용단도 창단 60주년 기념작으로 무용극 '호동'을 지난 27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화려한 한복 대신 흰 레깅스와 재킷만으로 간소화해 춤의 표현에 집중한 것이 특징이에요. /국립오페라단·국립극장
이처럼 하나의 원형 콘텐츠를 여러 형태로 바꿔 활용하는 방식을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라고 합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는 무용극과 오페라뿐 아니라 영화·드라마·발레 등 다양한 장르로 각색되며 사랑받았는데요. 이 설화의 내용과 함께 올해 각각 무용극과 오페라로 공연된 두 작품에 대해 알아볼게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비극적 설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고려 인종 때인 1145년 김부식이 펴낸 역사책 삼국사기에 나오는 설화입니다. 고구려의 왕자인 호동과 낙랑국 공주의 비극적인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이 설화에서 낙랑공주는 적국인 고구려의 왕자 호동을 너무나 사랑해서 조국을 배신하고 스스로 위험에 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적병이 오면 스스로 북을 울려 나라를 지켜주는 신비한 악기 '자명고'를 찢기도 하지요.
호동왕자는 고구려의 제3대 왕인 대무신왕(4~44)의 서자로 태어났어요. 고구려 제2대 왕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은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국토를 확장했다는 평을 받는데, 대무신왕 역시 현재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조명받는 역사적 인물 중 하나예요. 대무신왕인 무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바로 '바람의 나라'로, 같은 이름의 온라인 게임과 뮤지컬이 만들어지기도 했지요.
호동왕자는 아버지인 대무신왕처럼 무예에 능했어요. 어느 날 사냥을 나선 그는 우연히 낙랑국의 왕 최리(崔理)의 행차를 만나게 되고, 왕의 초대를 받아 낙랑에 가게 됩니다. 호동왕자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낙랑공주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어요. 그렇게 행복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호동왕자가 낙랑국을 떠나 고구려로 돌아가게 되면서 두 사람은 슬픈 이별을 하게 되지요.
고구려에 돌아간 호동왕자는 아내가 있는 낙랑국 정벌에 나서게 되는데요. 그는 낙랑공주에게 "자명고를 찢어 달라"는 부탁을 하죠.
가족과 낙랑국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알지만, 결국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의 말대로 북을 찢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공주를 단칼에 베어버려요. 그리고 호동왕자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는 슬픈 결말로 끝을 맺습니다.
국악기 활용 최소화… 이질적 음색 더해
이처럼 자명고라는 신비한 악기가 등장하며 고구려를 배경으로 사랑과 배신이 펼쳐지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다양한 공연 예술 장르로 변주되고 있는데요.
지난 29일 막을 내린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호동'은 국립무용단이 1974년 선보인 무용극 '왕자 호동'과 1990년 선보인 '그 하늘 그 북소리'를 계승하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작품 속에서 아버지 대무신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를 통치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아내인 낙랑공주까지 이용해야 했던 호동왕자의 운명은 집단과 사회 안에서 억눌리고 소외되는 개인의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뮤지컬 '아마데우스' '광화문 연가'를 연출한 것으로 유명한 뮤지컬계 1세대 연출가인 이지나가 연출을 맡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에 참여한 작곡가 이셋(김성수)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했어요. 그래서 타 장르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협업을 시도했다는 평을 받는데요.
이 작품은 국악 리듬에 국악기 활용은 최소화하면서 여기에 신시사이저(synthesizer·전기신호를 이용해 다른 악기의 소리를 흉내 내거나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악기)와 인도 전통악기인 하모니움(오르간의 일종), 서양 현악기들의 이질적인 음색을 더한 것이 특징이에요. 이를 통해 과거와 현대의 시간적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를 했지요.
또 무대장식과 소품을 최대한 배제했어요. 의상 역시 기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됐던 화려한 한복 대신 흰 레깅스와 재킷만으로 간소화해 춤의 표현에 집중했고요.
국립무용단 단원 44명이 모두 등장하는 역동적인 군무 장면, 그리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사랑과 이별을 표현하며 추는 2인무가 대비되면서도 어우러져 한국 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무대로 평가된답니다.
외국인이 무대·의상 재해석해
지난 3월 공연됐던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왕자, 호동'에서 낙랑공주는 한층 강인한 여성으로 묘사됩니다. 자명고를 찢기 전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과 조국의 멸망을 예견하지만, 원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죠.
오페라는 통상 막과 막 사이에 해설자가 등장하는데요. 이 작품은 기존 오페라 작품과 달리 막과 막 사이 해설자로 국악인이 등장해요. 고구려 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지요. 또 의상과 무대 디자인은 아일랜드 출신 무대·의상 디자이너인 코너 머피가 맡았는데, 외국인의 시각으로 고구려 설화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해요.
하지만 호동왕자 설화의 시대적 배경을 유추할 수 있는 고구려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과 4~5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고분 벽화·그림 등이 북한에 남아 있어 고증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당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보다 현대적인 디자인을 더해 재해석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