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항일운동 도운 두 명의 일본인… 건국훈장 추서됐죠

입력 : 2022.10.19 03:30

후세 다쓰지와 가네코 후미코

1926년 3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에 관한 기사. 그는 당시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로 고통받는 나주 농민들을 위해 일본을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했어요. 기사에는 당시 나주군 궁삼면에 다녀온 후세 다쓰지가 “조사 결과 애매하게 면민의 소유권을 박탈한 것”이라며 “압박이 있어도 조사하겠다”고 말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어요.
1926년 3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에 관한 기사. 그는 당시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로 고통받는 나주 농민들을 위해 일본을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했어요. 기사에는 당시 나주군 궁삼면에 다녀온 후세 다쓰지가 “조사 결과 애매하게 면민의 소유권을 박탈한 것”이라며 “압박이 있어도 조사하겠다”고 말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어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75) 전 일본 총리가 지난 6일 전남에 있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어요. 관람하고 나온 뒤에 그는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들이 한국 조선인들에게 차별을 한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알 기회가 됐고,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어요. 하토야마 전 총리는 2009년 제93대 총리에 선출된 후 한일 역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고, 퇴임 이후에도 일제의 과거사를 사죄하는 활동을 해왔는데요.

이런 소신을 가진 일본인이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도 존재했어요.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가 그 주인공이에요. 이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도운 공으로 건국훈장을 받기도 했답니다.

2·8 독립 선언 계기로 조선인 변호

후세 다쓰지는 일본 미야기현 한 농부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소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때 제자백가 중 한 명인 묵자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묵자의 겸애설(兼愛說), 즉 "나와 타자를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이 사상은 그의 인생 전반을 지배하는 신념이 됐죠. 1899년 그는 고향을 떠나 도쿄로 상경해 메이지 법률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1년 6개월 정도 검사로 활동하다 변호사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본 내 사회적 약자를 변호하는 활동에 앞장섰다고 해요.

그러던 그는 1919년 우리나라 3·1 운동이 일어날 무렵 조선인 변호까지 활동 반경을 넓히는데요.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같은 해 2월 8일 우리나라 재일 유학생들은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을 발표했어요. 이때 최팔용·백관수 등 조선인 9명이 체포됐는데, 후세 다쓰지가 이들의 2차 변호를 맡게 됩니다. 이 사건이 그의 첫 조선인 변호 활동이었어요. 당시 체포된 이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조선인들은 자신들을 도와준 후세 다쓰지에게 큰 신뢰감을 갖게 됐다고 해요.

의열단원으로서 황궁에 폭탄을 투척하려고 했던 김지섭을 변호한 것도 후세 다쓰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유명세는 엄청났어요. 1923년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했는데, 당시 서울역에는 그를 환영하는 인파가 엄청나게 몰렸다고 해요.

그가 맡은 사건 중 독립운동가 박열의 변호는 특히 주목받았습니다. 1923년 9월 일본 관동 지방에서 진도 7.9의 지진이 발생했는데요. 일본 정부는 사회적 혼란을 진정시키려고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어요. 지진이 일어난 것을 조선인의 탓으로 돌렸고, 수천명의 조선인이 일본 관헌(관청)과 민간인에게 이유도 없이 학살됐어요. 이 사건을 관동대학살(關東大虐殺)이라고 합니다.

정부도 진정시키기 어려울 만큼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만연해지자 일본은 이후 일왕 암살 미수 사건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주모자로 당시 일본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박열을 지목해 체포합니다. 검사 측은 박열을 내란죄(정부에 반대해 조직 등을 갖추고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명목으로 기소했는데, 이때 후세 다쓰지는 박열을 적극 변호하며 "그는 정당한 항일 투쟁을 전개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이후에도 그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강하게 비판하며 돈을 받지 않고 수많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를 변호했어요. 그런 그를 일본 정부가 좋게 봤을 리가 없겠죠. 결국 1932년 그는 "법정 모독을 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어요. 해방 후 변호사 자격이 회복되었고 1953년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변호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어요.

이런 공을 인정받아 우리나라 정부는 2004년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죽은 뒤 훈장 등을 줌)했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고 쓰여 있다고 해요.

박열과 함께 활동한 일본인 아내

후세 다쓰지가 일왕 암살 미수 사건에서 박열과 함께 변호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입니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는데,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요. 부모의 불화로 여덟 살 때 한국에 살던 고모부의 양녀가 됐지만, 오히려 식모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했죠.

그는 1919년 7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어요. 17세가 되던 해에는 자립을 위해 도쿄로 떠나 신문팔이, 인쇄소 직공 등의 일을 전전했어요. 그는 한 어묵집에서 일하며 재일 유학생을 많이 만나게 됐는데, 그러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해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박열의 시를 읽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박열은 모든 조직과 규율·권위 등을 거부하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추구하고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온갖 착취를 경험하며 사회에 불만을 키워온 가네코 후미코 또한 그의 사상에 적극 동조하며 친분을 쌓아나갔어요.

가네코 후미코는 재일 조선인 사상 단체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고, 기관지인 '흑도'를 발행했어요. 발행 비용을 충당하려 낮에 조선 옷을 입고 인삼 행상으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나아가 직접 흑도에 글을 쓰며 일본인이 가진 우월 의식과 탐욕을 비판하고,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했어요. 1923년에는 박열과 함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항일 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직접 조직해 강력한 항일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관동에 대지진이 발생한 후 박열과 함께 일왕 암살 미수 혐의로 붙잡힙니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서 매우 당당했다고 해요. 일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행동은 자신의 철학에 따른 정당한 행동이었음을 밝혔고, 재판장에 조선 옷의 상징인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나오기도 했지요.

또 재판에서 사형 판결이 나오자 즉시 만세를 외치며 절규했다고 해요. 후에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그는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하며 싸움을 이어나갔어요. 그러다 1926년 7월 23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공은 뒤늦게 빛을 봐 2018년 건국훈장이 추서됐지요.
1927년 1월 21일 조선일보에 실린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왼쪽)와 박열의 모습.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와 함께 실렸어요.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형무소 측이 시신을 감추고 죽음을 바로 공표하지 않아 당시 타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어요.
1927년 1월 21일 조선일보에 실린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왼쪽)와 박열의 모습.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와 함께 실렸어요.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형무소 측이 시신을 감추고 죽음을 바로 공표하지 않아 당시 타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어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6일 오후 광주 전남대에서 ‘우애에 기반한 동아시아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연합뉴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6일 오후 광주 전남대에서 ‘우애에 기반한 동아시아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연합뉴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