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국왕이나 왕실이 허용한 화가만 그릴 수 있었죠

입력 : 2022.09.26 03:30

왕과 왕족을 그린 그림

작품1 - 에드윈 랜시어, ‘새로운 시대의 윈저성’(1845). /영국 왕실 소장(Royal Collection)·프라도국립미술관·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
작품1 - 에드윈 랜시어, ‘새로운 시대의 윈저성’(1845). /영국 왕실 소장(Royal Collection)·프라도국립미술관·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
지난 19일(현지 시각)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이 전 세계 방송으로 생중계됐어요. 지구 곳곳에는 여왕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여왕이 젊었던 시절부터 중년의 여성이 됐을 때,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할머니로 바뀐 이미지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여왕이 어떤 공식 행사에서 어떤 색깔의 모자를 썼는지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요. 텔레비전으로 보아 온 덕분입니다.

과거 대중 매체가 없던 시절에는 국왕의 실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지극히 제한돼 있었어요. 국왕의 초상은 오직 국왕이 임명하거나 왕실에서 특별히 허용한 화가에 의해서만 제작됐지요. 화가들은 국왕과 왕실 가족을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기로 해요.

근엄한 풍모 대신 일상의 모습으로

〈작품 1〉은 184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 부부를 그린 '새로운 시대의 윈저 성'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은 64년으로, 재위 기간이 70년인 엘리자베스 2세 다음으로 영국에서 가장 오래 왕좌에 있었던 군주이지요.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당시 영국 왕립미술원에 소속돼 있던 에드윈 랜시어(1802~1873)인데요. 동물을 특히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어요. 이 그림에서도 재롱을 피우는 개들과 사냥해온 죽은 새들이 섬세하게 묘사돼 있네요.

빅토리아 여왕은 랜시어에게 그림을 의뢰할 때 근엄한 풍모로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닌 일상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달라고 주문했어요. 윈저성을 배경으로 남편인 앨버트 공과 어린 딸, 그리고 애완견을 등장시킨 이 그림에는 20대 젊은 여왕이 원하는 평화로운 가족의 이미지가 담겨 있어요. 취미 활동으로 사냥을 나갔다 돌아온 듯 보이는 남편에게 아내인 여왕은 수줍은 듯 자그마한 들꽃 다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마 성 근처를 산책하면서 직접 딴 꽃이겠지요.

그림 속에 화가 자신 등장시키기도

〈작품 2〉는 스페인 왕실이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에게 의뢰한 그림으로, 1800년쯤 그려졌어요. 제목은 '카를로스 4세의 가족'입니다. 왕실 가족이 마치 기념 촬영이라도 하듯 한자리에 늘어서 있네요. 그중에서도 현재 왕과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은 다른 가족보다 반 걸음 정도 앞으로 나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편에 어두운 색의 군복을 입고 가슴에 훈장을 여러 개 달고 있는 사람이 황제 카를로스 4세(재위 1788~1808)이고, 왼쪽 끝 부분에 파란색의 군복을 입은 사람은 앞으로 왕이 될 큰아들인 페르난도 왕자이지요. 둘은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그리 사이좋은 관계가 아니었다고 해요. 아들은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페르난도 왕자가 손을 잡고 있는 여성의 얼굴이 뒤를 향해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인데요.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릴 무렵인 1800년쯤에는 왕자의 신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래의 신부인 셈이죠.

화면의 어두컴컴한 왼편 뒤쪽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고야의 얼굴이 보입니다. 고야가 왕족의 그림에 자신의 모습을 끼워 넣은 것은 그곳에 본인이 있었고, 직접 이들의 모습을 그렸다는 자부심 넘치는 서명과 같은 기능을 하는데요. 이는 고야 이전에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가 남긴 유명한 왕실 그림 '시녀들'을 참고한 것이라고 해요.

〈작품 3〉이 바로 1656년 무렵 그려진 '시녀들'입니다. 이 그림은 사실 제목부터 이상합니다. 왕실 가족을 그려야 하는 궁정 화가가 왜 시녀들을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죠. 중앙의 어린 소녀는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공주인데, 시녀들의 시중을 받는 중입니다. 화가인 벨라스케스는 왼쪽 대형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자신을 작품에 등장시켰어요. 뒤쪽에서는 누군가 문에 서서 계단을 오르려 하고, 그 옆으로 거울에 두 사람이 흐릿하게 비쳐 보입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공주의 부모인 국왕 펠리페 4세(재위 1621~1665)와 마리아나 왕비지요.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그릴 당시 공주의 앞에 왕과 왕비가 와서 서 있다는 것을 거울로 알려준 거예요. 그러니 이 그림의 실제 주인공은 시녀들이 아니라, 왕과 왕비, 그리고 마르가리타 공주인 것이랍니다.

여왕 사진으로 판화 찍어

〈작품 4〉는 팝아트로 유명한 미국의 미술가 앤디 워홀(1928~1987)이 1985년 판화로 찍어낸 여왕 엘리자베스 2세입니다. 그는 1977년도에 찍힌 여왕의 사진 하나를 스케치 대신 활용해 색채 배치를 달리한 4가지 종류의 판화를 찍었어요. 이전에도 이미 워홀은 만인에게 사랑받는 배우나 가수, 또는 통조림 수프의 이미지를 판화로 제작한 바 있는데요. 똑같은 방식으로 여왕의 이미지도 만든 거예요.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 이미지를 통해 수많은 대중에게 익숙해지고 친근하게 느껴지게 된 여왕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회화 이미지로 남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죠.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왕은 누구나 다 아는 대중적인 인물이니 말이지요.
작품2 - 프란시스코 고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1800년쯤). /영국 왕실 소장(Royal Collection)·프라도국립미술관·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
작품2 - 프란시스코 고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1800년쯤). /영국 왕실 소장(Royal Collection)·프라도국립미술관·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
작품3 -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1656년쯤). /영국 왕실 소장(Royal Collection)·프라도국립미술관·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
작품3 -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1656년쯤). /영국 왕실 소장(Royal Collection)·프라도국립미술관·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
작품4 - 앤디 워홀, ‘여왕 엘리자베스 2세’(1985). /영국 왕실 소장(Royal Collection)·프라도국립미술관·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
작품4 - 앤디 워홀, ‘여왕 엘리자베스 2세’(1985). /영국 왕실 소장(Royal Collection)·프라도국립미술관·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