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 유엔이 인정했어요

입력 : 2022.09.15 03:30

대한민국 수립
1946년 北에 들어선 단독 정권이
분단 고착화… 김일성 독재 길 열어
결국 유엔 감시하에 南에서만 선거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수립 선포식.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수립 선포식.
초등학교 5~6학년이 내년부터 사용할 사회 과목 검정 교과서 11종 중 '대한민국이 1948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쓴 교과서는 2종뿐이라는 뉴스가 나왔어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교육 현장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우려가 크다는 것입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이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탈린의 지령 "북한 정권을 수립하라!"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는 일제 지배에서 벗어나는 광복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됐어요. 원래 이것은 한국이 독립해 나라를 세우기 전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임시 조치일 뿐이었어요. 연합국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일제의 침략을 받고 있는 한국에 대해 '독립시킬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전승국 중의 하나인 소련은 일본 통치에 참여하려는 한편 아프리카 북단의 지역인 트리폴리타니아를 얻어 지중해 진출의 길을 열려고 했어요.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1945년 9월 소련 최고 권력자 스탈린은 38선 이북의 소련군에 "(북한) 정권을 세우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북한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이 지령에 따라 1946년 2월 북한에 들어선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사실상 정부의 기능을 수행했고, 김일성 1인 독재의 길을 열었습니다. 분단을 고착화한 '단독 정권'은 북한에 먼저 세워졌던 것입니다.

5·10 선거와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미국·영국·소련) 외무장관 회의는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해 협의한다'고 결의했습니다. 이에 38선 이남에서 격렬한 반탁(反託·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지요. 이 회의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1946~1947년의 미·소 공동위원회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한국의 독립 문제는 1947년 9월 유엔(UN) 총회에 의제로 상정됐습니다.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한다는 것이 결정됐죠. 그래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발족돼 1948년 1월 한국에 도착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38선 북쪽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2월에 유엔 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감시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8년 5월 10일 제헌(制憲·헌법을 만들어 정함)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유엔 감시하에 이뤄졌습니다. 위원단이 들어갈 수 없었던 38선 이북의 선거를 유보하고, 선거가 가능한 38선 이남에서만 치러진 선거였죠. 선거권(투표할 수 있는 권리)은 만 21세 이상의 남녀 국민, 피선거권(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될 수 있는 권리)은 만 25세 이상의 남녀 국민이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선거인 명부 등록자 중 95.5%가 참여한 이 선거로 모두 198명의 제헌의원(1대 국회의원)이 선출됐고, 이에 따라 구성된 제헌국회는 같은 해 7월 17일 대한민국의 첫 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장하는 민주공화정 체제임을 분명히 했죠. 국회는 7월 20일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했습니다(1952년 2대 대통령 선거부터는 국민 직접선거로 선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

"세 돌 맞은 8·15 해방기념일. 지리한 장마도 개어 맑은 하늘빛이 더욱 맑아 보이는 첫 새벽부터 가가호호(家家戶戶·한 집 한 집)에는 국기를 게양하고 깨끗이 청소한 시가에는 중앙청 광장을 중심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48년 8월 16일 자 조선일보가 그 전날인 8월 15일 있었던 대한민국 수립 선포식의 광경을 전한 기사입니다.

마침내 광복 3년 만인 이날 대한민국의 수립이 세계만방에 선포됐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하며 국제 통상과 공업 발전에 힘쓰겠다"고 밝혔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취한 향후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를 예고하는 듯한 말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나라라는 것을 선언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라를 다시 세웠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왕조가 이어진 뒤 식민 지배까지 받았던 우리 민족이 비로소 자유·보통선거와 복수정당제에 토대를 둔 의회민주주의의 역사를 시작하게 됐던 것입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선거 협의해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이해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의 제3차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Ⅲ) 2항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명시했습니다. 원문을 자세히 보죠.

"Declares that there has been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감시하고 협의할 수 있었으며 한국인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한반도 내 지역에 관해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음을 선언한다.]…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그리고 이것은 코리아(한반도)에서 유일한 그런(합법적인) 정부임을 선언한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주관한 선거에 의해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관할 범위는 남한이지만, 한반도 전체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선 이 결의문을 '대한민국은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잘못 번역했고, 이후 검인정 교과서에 이런 잘못된 내용이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썼던 한 교과서 필자는 나중에 공직자가 된 뒤 국회에서 "내 생각이 틀렸다"며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가 맞는다"고 했죠. 이런 오역은 무슨 효과를 낳을까요? '북한도 1948년 정권 수립 당시 한반도의 합법 정부였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승인을 얻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대표단.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진구 김활란 장면 조병옥 모윤숙. /운석장면기념사업회
대한민국 승인을 얻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대표단.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진구 김활란 장면 조병옥 모윤숙. /운석장면기념사업회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유엔 감시하에 이뤄졌어요. 사진은 당시 투표장 모습.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유엔 감시하에 이뤄졌어요. 사진은 당시 투표장 모습.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