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러시아 南下 막겠다고 영국이 우리 섬 무단 점령했죠
입력 : 2022.08.18 03:30
거문도 사건
- ▲ ①1885년 영국의 동양함대 세 척이 돌연 조선 영토인 거문도를 점령했어요.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였죠. 당시 거문도 주민들은 의외로 큰 마찰 없이 영국군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는데요.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급여와 의료 서비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진은 당시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 해병대 장교와 거문도의 유지들이 함께 찍은 사진. ②거문도에 남아 있는 영국군 묘지 공원. /조선일보DB·여수시
중앙아시아 주도권 둘러싼 경쟁
혹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 me)'이란 역사 용어를 들어본 적 있나요? 1813년부터 1907년까지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였던 전략적인 경쟁을 뜻하는 말이에요. 영국은 인도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남쪽에서 러시아를 저지했고,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1년 내내 얼지 않는 항구)을 손에 넣기 위해 북방에서 인도양 쪽으로 진격하려 했죠.
그런데 이것은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만 벌어진 경쟁이 아니었습니다. 동유럽에서 티베트를 지나 극동까지 유라시아 전역을 무대로 두 강대 제국(帝國)의 남북 대결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프랑스 등이 연합해 흑해 북쪽 크림반도에서 러시아와 싸운 크림전쟁(1853~1856) 당시, 영국 함대는 서쪽으로 발트해의 러시아 요새를 공격하는 한편 동쪽으로는 아시아 대륙을 돌아 한반도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점령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가 1867년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아넘긴 것도 당시 캐나다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전(全) 지구적인 대결이라 할 만했죠.
英의 거문도 점령 예상치 못했던 조선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876년 외국과 통상할 수 있도록 항구를 개방하는 개항(開港)을 하게 된 것이죠. 1882년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에 이어 1883년 영국은 서양 열강 중 두 번째로 조선과 수교를 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세력을 남쪽으로 뻗으려 했지만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이 시도가 막혔습니다. 그러자 방향을 바꿔 이미 점령한 연해주를 발판으로 동아시아와 태평양 쪽으로 남하하려 했죠. 1884년 조선과 수교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항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조선 조정에 접근했습니다. 조선은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고통스러워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러시아가 조선의 원산 앞바다인 영흥만을 장악하려 한다는 정보가 영국 측에 입수됐습니다.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가만히 있지 않고 예상을 뛰어넘은 행보에 나섰습니다. 1885년 3월, 영국의 동양함대 세 척이 돌연 조선 영토인 거문도를 점령했습니다.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막기 위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해안포 진지와 보급 기지를 만들려는 선제적 공격 조치였는데, 이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우방국인 조선의 영토를 무단으로 빼앗은 불법 점령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문도 사건'이었죠.
국제 정세에 밝지 못했던 조선은 영국의 이 같은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물론, 러시아·청·일본보다도 뒤늦게 이 사실을 전달받아야 했습니다. 조선은 영국에 항의하고 각국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열강은 약소국 조선의 말에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대책 없이 2년간 영토 빼앗겨
당시 영국에서 발행한 세계지도를 보면 한반도 남쪽에 뜻밖의 지명을 표기해 놓은 걸 볼 수 있습니다.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는 곳인데요. 바로 거문도였습니다. '1845년 이곳을 탐사한 영국 배 사마랑호가 거문도를 발견했다'며 당시 해군부 차관에게서 딴 '해밀턴'이란 이름을 붙인 건데요. 주권국인 조선의 영토이고 이미 주민이 살고 있는 섬을 '발견'하고 자기네 이름을 붙였다니 우스운 일이었죠. 언제라도 이곳에 상륙할 수 있다는 계획을 세워뒀던 영국군은 1885년 실제로 거문도를 점령하고 나서 마치 자국 영토인 듯 '해밀턴항'이라 불렀던 겁니다.
동북아의 세력 균형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한 서구 열강은 잇달아 거문도로 군함을 파견해 영국군을 견제했습니다. 이 때문에 거문도 일대는 세계 군함 전시장처럼 됐다고 합니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잇는 바닷길의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라는 점에서 거문도는 '동쪽의 지브롤터(대서양에서 지중해로 들어가는 길목의 영국 영토)'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거문도 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의외로 큰 마찰 없이 영국군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는데요.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급여와 의료 서비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영국군은 테니스장을 만들고 통조림을 먹으면서 유럽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다소 호전됐습니다. 결국 청나라가 중재에 나서서 조선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러시아로부터 받아냈고, 영국군은 1887년 2월 거문도에서 철수했습니다.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국방력과 외교력이 미약했던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자기 영토가 2년 가까이 외국 군대에 침탈을 당했는데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습니다. 불과 135년 전의 쓰라린 역사입니다.
[일제 침략도 '그레이트 게임'?]
크게 볼 때 거문도 사건뿐 아니라 이후 벌어진 일본의 조선 침략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부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삼았고,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일본이 영국을 대신해 러시아와 싸운 일종의 대리전이었으며, 그 결과 1910년의 한일 강제병합이 일어났다는 얘기죠. 그레이트 게임은 1907년 영러 협상으로 일단락됐고 누가 봐도 영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후반에 펼쳐진 미국과 소련의 냉전(冷戰)을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전으로 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