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AI가 쓴 詩, 사람이 낭송… 무대에선 AI 무용수 춤추죠

입력 : 2022.08.15 03:30

인공지능(AI) 공연

①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올려진‘파포스(Paphos)’공연은 인공지능(AI)이 쓴 시 20편을 바탕으로 만든 거예요. AI 시아가 쓴 시가 무대에 설치된 화면에 띄워진 모습이에요. ②~③이 작품은 줄거리가 없어요. AI 시아가 쓴 시는 배우들의 움직임과 낭송을 통해 표현됩니다. /리멘워커
①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올려진‘파포스(Paphos)’공연은 인공지능(AI)이 쓴 시 20편을 바탕으로 만든 거예요. AI 시아가 쓴 시가 무대에 설치된 화면에 띄워진 모습이에요. ②~③이 작품은 줄거리가 없어요. AI 시아가 쓴 시는 배우들의 움직임과 낭송을 통해 표현됩니다. /리멘워커
그리스신화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 합니다. 아주 먼 옛날, 지중해에 있는 키프로스섬에 '피그말리온(Pygmalion)'이라는 왕이 살았어요. 왕은 섬에 사는 여자들의 문란한 생활을 보며 여성혐오증이 생겼고, "앞으로 그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대신 그는 상아로 자신의 이상형의 모습을 조각합니다. 그런데 완성품이 어찌나 완벽하고 아름다운지, 왕은 살아 있는 연인을 대하듯 조각상에 입을 맞추고, 사랑이 담긴 손길로 만지고, 함께 잠듭니다. "이 차가운 조각상이 따뜻한 체온을 품은 여인이 될 수만 있다면!" 왕은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이렇게 기도하고, 여신은 마침내 소원을 이뤄 줍니다.

피그말리온은 조각상에 '갈라테이아(Galatea)'라는 이름을 붙여 준 뒤 결혼합니다. 둘 사이에서는 '파포스(Paphos)'라는 아이도 태어났어요. 아이의 성별은 불확실하지만, 이 이름은 길이 남아 키프로스의 유명한 고대 유적 도시의 지명이 됐답니다.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른 '파포스' 공연의 제목은 이 신화에서 따왔습니다. 이 작품은 인공지능(AI)이 쓴 시 20편을 바탕으로 만든 건데요. 작가인 '시아(SIA)'는 카카오 계열사인 AI 전문 기업 카카오브레인과 미디어아트 그룹 슬릿스코프가 공동 개발한 AI 시인입니다. 인간인 피그말리온왕과 그가 만든 조각상 갈라테이아 사이에서 생긴 아이 이름이 '파포스'인 것처럼, 공연 제목은 인간과 기계의 결합으로 이뤄진 상상의 결과물을 의미한답니다.

배우 움직임과 낭송으로 표현

이 작품은 국내 최초의 '인공지능 시극(詩劇)'입니다. 줄거리가 없어요. AI 시아가 쓴 시는 배우들의 움직임과 낭송으로 표현됩니다. 예컨대, 시아가 쓴 '시를 쓰는 이유'라는 시가 화면에 띄워지면, 어둠 속에서 배우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시를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 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말을 하는 것이고, 하나의 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말을 줄이는 것이며, 덜어내고 덜어내서 최후에 남는 말이 시입니다." 때로는 시아가 쓴 시구가 화면에 띄워지고 배우들이 이를 몸짓으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시아는 지난해 태어났어요. 인터넷 백과사전과 뉴스를 읽으며 한국어를 공부하고, 시 1만여 편을 읽고 학습해 시를 쓰게 됐습니다. 시아는 30초 만에 시 한 편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요. 지난 8일에는 시아가 쓴 시 53편이 담긴 '시를 쓰는 이유'라는 제목의 시집이 출판되기도 했어요. 1980년대 이후의 현대시 1만2000편을 읽고 작법을 배워 쓴 시들이지요.

아직은 결과물을 내려면 인간이 개입해야 할 수준이지만, AI가 어디까지 창의력을 확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해요. 나아가 'AI가 창작한 시를 예술로 볼 수 있는지' '인간과 AI의 공생으로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지요.

국립현대무용단의 춤추는 AI 마디

AI와 사람이 결합해 만든 또 다른 공연이 있습니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재작년 선보인 '비욘드 블랙(Beyond Black)'이라는 작품인데요. AI '마디(Madi)'는 한국 최초의 '춤추는 인공지능'으로 불립니다. 무대 위에서는 실제 무용수가 춤을 추고, 그 뒤로 보이는 화면에 인간의 모습을 입힌 AI 무용수의 움직임을 띄우는 식이에요.

AI 마디는 무용수 8명의 움직임을 학습한 후 안무를 고안해 춤을 췄다고 합니다. 우선 무용수가 '크로마키(영상 화면 합성 기술을 위한 세트)' 앞에서 춤추는 장면을 촬영합니다. 그리고 이 영상 데이터를 AI에 입력하면 무용수의 머리·무릎과 같은 특징적인 부위나 관절은 점으로, 뼈는 관절을 잇는 선으로 인식됩니다. 과거 유행했던 캐릭터인 '졸라맨'의 모습처럼 말이지요.

무용수의 춤동작은 '빠르고 부드럽게' '빠르고 강하게' 같은 형태로 변환돼 입력된다고 하는데요. 무용수의 움직임을 많이 학습할수록 마디의 안무는 완성도가 높아집니다. 이처럼 다양한 예시를 통해 AI가 학습하도록 가르치는 기법을 '딥 러닝(Deep Learning)'이라고 불러요.

인간은 춤을 보고 감정이나 자의식을 통해 '아름답다'는 개념을 느낍니다. 하지만 마디는 미(美)의 개념을 관람자의 미세한 표정 변화나 생체(바이털) 신호를 통해 포착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 관람객이 보이는 표정이나 생체 신호 등을 미리 학습하는 거지요.

AI가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은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닙니다. 국내 최초 AI 작곡가 '이봄(EvoM)'은 불과 10초면 한 곡을 작곡해 낸다고 해요. 스페인의 AI 작곡가 '이아무스(iamus)'가 발표한 '헬로 월드(Hello World)'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도 했죠.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생각해 왔던 예술적 창의성을 AI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검증하고 있는 과도기적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라벡의 역설]

미국 로봇공학자인 한스 모라벡은 1970년대에 컴퓨터와 인간의 능력 차이를 이렇게 표현했어요. "어려운 일은 쉽고, 쉬운 일은 어렵다(Hard problems are easy and easy problems are hard)." 인간이 잘하는 일은 기계에 어렵고, 기계가 잘하는 일은 인간이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를 '모라벡의 역설'이라고 해요. 인간이 쉽게 하고 있는 걷기·느끼기·듣기·보기 등의 행위를 로봇이 하려면 매우 어려운 기술이 필요한 반면, 인간에게 어려운 수학적 계산이나 분석 등을 컴퓨터는 순식간에 해낸다는 거지요. 인간의 감정과 창의력의 결집인 예술이 과거에는 기계에 어려운 일이었지만, AI 예술가의 등장으로 이 역설이 바뀌는 미래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