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대회 기간 유대인 탄압 흔적 지우며… 나치 선전에 이용

입력 : 2022.06.29 03:30

베를린 올림픽과 히틀러

①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당시 경기장 앞에 히틀러의 유겐트(청소년 조직) 단원 등이 도열해 있는 모습. 성화 봉송 주자가 달려올 수 있도록 가운데에 길을 만들었어요. ②독일 정부는 나치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약 10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설계했어요. ③아돌프 히틀러가 올림픽 개막식에서 올림픽기에 경례하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①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당시 경기장 앞에 히틀러의 유겐트(청소년 조직) 단원 등이 도열해 있는 모습. 성화 봉송 주자가 달려올 수 있도록 가운데에 길을 만들었어요. ②독일 정부는 나치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약 10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설계했어요. ③아돌프 히틀러가 올림픽 개막식에서 올림픽기에 경례하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지난달 마라톤 선수인 고(故) 손기정 선수의 친필이 담긴 엽서와 흑백사진 한 장이 경매에 출품됐어요. 엽서에는 'KOREAN'(코리안) 글씨가 적혀 있고, 흑백의 원본 사진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린 모습이 담겨 있었죠. 이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그는 세계 신기록(2시간 29분 19초)을 세우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손기정 선수가 참가했던 이 올림픽은 정치적 성격이 매우 짙었던 '나치 올림픽'으로도 유명합니다.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됐는데, 순수한 스포츠 정신에 따른 경쟁이 아니라 정치 선전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죠. 당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올림픽이 선전 도구로

193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독일 베를린이 1936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됩니다. 1933년 독일 총리가 된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처음엔 올림픽에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갑자기 '독일 국민의 건강 향상과 정신적인 즐거움'을 앞세워 올림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해요. 그가 이렇게 생각을 바꾸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인종주의와 반(反)유대주의를 내세우던 독일 정부는 1933년부터 유대인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유대인 기업에 대한 국가적 보이콧(불매운동)을 선언했고, 유대인을 관공서와 공공기관에서 추방하기 시작했죠. 체육 시설에 유대인이 출입하는 게 금지됐고, 1935년 9월에는 '독일 혈통과 명예 보호법'을 통과시켜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합니다.

이를 두고 서방 여러 국가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냈어요. 그러자 독일 정부는 이를 잠재우기 위해 무엇인가 대대적인 선전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올림픽이었던 거예요. 전 세계에 독일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각인시킬 기회라고 여긴 거지요.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독일에서 올림픽을 열면 안 된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인종에 우열을 정해 차별하고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말을 퍼뜨리는 히틀러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올림픽을 여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였어요. 미국에서는 선수단을 보내면 안 된다는 보이콧운동이 일어났고,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개최 직전까지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거부했어요.

이에 독일 정부는 "유대인을 독일 대표팀에서 배척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게 됩니다. 올림픽 유치가 취소되면 손해가 클 것이라 판단한 거예요. 그리고 1934년에는 21명의 유대인 선수가 선수단 캠프에 들어갔다고 발표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유대인 선수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아 선수들이 출전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남녀 1명씩의 유대인 선수만이 대표팀에 선발됐죠. 우여곡절 끝에 서방 여러 국가가 선수단 파견에 동의하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이 올림픽은 당시 역대 최다 국가인 49국, 3963명의 선수가 참가한 규모였어요.

치밀하게 올림픽 준비한 독일 정부

독일 정부는 아주 치밀하게 올림픽을 준비했는데요. 당시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가 앞장섰어요. 호텔이나 카페 입구에 걸려 있던 유대인 출입금지 표시가 사라졌고, 반(反)유대인 신문도 진열대에서 보이지 않았어요.

독일 정부는 올림픽 선수촌 건설과 준비에 돈을 아끼지 않았어요. 올림픽 방문객은 호텔뿐 아니라 배·철도·버스 등도 특별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었죠. 퇴폐적이며 반체제 음악이라는 이유로 금지했던 '재즈(Jazz)' 음악도 일시적으로 연주할 수 있게 허용했어요. 이에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 허위 선전에 속아, 인종차별은 전혀 없을 것만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꼈다고 해요.

1936년 8월 1일, 베를린의 주경기장에서 성대한 올림픽 개막식이 거행됩니다. 독일 정부는 세계인들을 시각적으로 압도하고 나치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약 10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설계했어요. 이곳에는 히틀러 유겐트(나치당이 만든 청소년 조직) 2만명과 준군사조직인 돌격대 4만명이 도열해 있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성화 봉송'이 등장하는데요. 최초로 올림픽 경기를 개최한 그리스의 아테네 올림피아부터 올림픽 개최 도시의 개막식장까지 릴레이 주자들이 횃불을 전달하는 거예요. 올림픽 성화가 경기장에 도착하자, 1896년 제1회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인 스피리돈 루이스는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정원에서 가져온 올리브 가지를 히틀러에게 선사했습니다. 독일은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로 히틀러를 선전했죠.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이 TV를 통해 중계된 것도 이때입니다. 당시 독일 정부는 좀 더 많은 국민에게 올림픽 열기를 전달하기 위해 베를린 시내 곳곳으로 경기 영상을 내보냈어요. 이 영상은 28개 언어로 번역돼 외국으로도 보내졌고, 이를 위해 32개 나라에서 67명의 독일 기자들이 보도를 했다고 해요.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올림픽에 취하게 만들고, 독일의 뛰어난 기술 수준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데 효과적이었어요.

올림픽은 16일간 이어졌는데, 수십만 관중을 수용하는 경기장은 날마다 깨끗한 모습이었다고 해요. 관중이 떠날 때 독일인들이 저마다 다른 사람의 쓰레기까지 들고 나와 출구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기 때문이죠. 독일 거리는 완벽하게 청소돼 있었고, 집의 문 손잡이나 유리창 등까지 매우 깨끗하게 닦여 있었습니다. 이런 청결한 이미지를 위해 독일 선수들은 순백의 유니폼을 착용했지요.

이 대회에서 독일은 금메달 33개, 은메달 26개, 동메달 30개를 따내며 미국을 제치고 1위를 거머쥐게 되는데요. 히틀러가 원했던 결말이었어요. 그는 올림픽을 통해 독일 민족의 육체적 강인함과 우수성을 전 세계에 확인시키고자 했거든요.

올림픽 끝나자 유대인 탄압 시작돼

독일의 나치 정권은 올림픽 효과를 톡톡히 봤어요. 방문객들은 "환상적이었다. 대단히 즐거웠다"며 독일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자국으로 돌아갔고, IOC도 베를린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한 결정에 흡족해했어요. 당시 유명 영화감독이었던 레니 리펜슈탈은 올림픽 경기를 담은 2부작 영화 '미의 제전' '민족들의 제전'을 제작했는데, 평화스러운 축제 장면을 영화에 담았고 IOC는 이 영화를 극찬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짧은 올림픽 기간에도 인종차별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히틀러가 흑인 선수들과 악수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올림픽을 통해 자국의 선전을 마친 독일 정부는 올림픽이 끝나자 다시 유대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유대인을 향한 공격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