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우아한 반가사유상, 절조 있는 세한도… 유물에 담긴 추억과 기억 들려줘요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l 출판사 어크로스 l 가격 1만6000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똑똑이'라고 불리는 친구가 있어요. 박물관이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로 진행하는 전시 해설 서비스인 '아침 행복이 똑똑'의 애칭이라죠. 문을 두드리고 나서 다정한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의 두근거림을 담은 이름이라고 해요. 똑똑이는 학예연구사(큐레이터)들의 전시 해설뿐 아니라 박물관을 방문한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도 전해준대요. 관람객들이 소장품에 대한 자신만의 추억과 느낌을 담아 쓴 문장들인데요. 일곱 살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의 큐레이터'가 되는 거예요.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인 정명희 박사가 최근 펴낸 이 책에는 박물관을 사랑하는 자신의 이야기와 박물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박물관 소장품 중 우아한 미소의 '반가사유상', 절조를 표현한 '세한도'는 많은 관람객이 똑똑이의 글감으로 삼는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책에선 그중 인상적인 일화들을 소개하기도 해요.
12년째 박물관대학 강좌를 듣는 은퇴한 최고경영자(CEO)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분은 첫 손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손녀와 함께 박물관에 오는 꿈을 꾸었다네요. 할아버지는 은은한 빛을 받는 박물관의 반가사유상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고 해요. 그 기억을 손녀와 나누며, 자신에게 머물렀던 평화를 언젠가는 손녀도 꼭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소망을 적어놓았다고 해요.
2018년에 열린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을 기획했던 저자는 전시회의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들려주는데요. 고려 시대 사찰인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안에서 두루마리 천 조각이 수습됐어요. 길이만 10m가 넘는 이 유물에는 신분을 망라한 1000여 명의 이름과 각자의 소망이 함께 적혀 있었어요. 14세기 중엽 제작된, 현존하는 유일한 이 고려 후기 불상은 수려한 용모로도 유명했지만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생생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이 '발원문'(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내용을 적은 글) 덕분에 그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고 해요. 발원문에는 멋지고 깊이 있는 문장도 적혀 있지만, 글자를 모르는 이가 삐뚤삐뚤한 글씨를 그림처럼 남긴 흔적도 함께 적혀 있었다고 해요.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 마음만큼은 귀하고 천한 신분으로 차별받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네요.
저자는 이렇게 말해요. "긴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전해진 유물은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과 우리를 이어준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전체의 일부라는 느낌이 위로가 되는 날이 있다." 당장 박물관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책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