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불굴의 의지·용기·유머로 국가를 위기에서 구했죠

입력 : 2022.03.16 03:30

처칠·드골·루스벨트 리더십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 8일 런던 화이트홀 한 건물에서 군중을 향해 ‘승리의 V’ 사인을 보내는 윈스턴 처칠(오른쪽)의 모습. 그는 취임 직후 “내가 (국민에게) 드릴 수 있는 건 피와 땀, 수고, 눈물밖에 없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어요. /위키피디아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 8일 런던 화이트홀 한 건물에서 군중을 향해 ‘승리의 V’ 사인을 보내는 윈스턴 처칠(오른쪽)의 모습. 그는 취임 직후 “내가 (국민에게) 드릴 수 있는 건 피와 땀, 수고, 눈물밖에 없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어요. /위키피디아

나라가 국난에 처했을 때 지도자의 리더십은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어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최근 전 세계가 한 지도자의 리더십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바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그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탈출을 위한) 탈것이 아니라 탄약"이라며 침공 직후 미국 측의 피신 제안을 거부하고, 수도인 키이우(키예프)에 남기로 했습니다.

그는 지난 8일 영국 하원에서 화상 연설을 했는데요. 이곳에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숲에서, 들판에서, 해변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싸울 것"이라며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였어요. 이 발언은 전 영국 총리인 윈스턴 처칠(1874~1965)의 연설 내용 일부를 인용한 거예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1940년 6월 프랑스 북부에서 나치 독일군에 포위당했던 영국군과 프랑스군 수십만 명을 철수시킨 ' 케르크 작전' 이후 "우리는 벌판과 거리에서 싸워야 한다. (…)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연설로 영국 국민의 항전 의지를 고취했어요.

젤렌스키는 코미디언 출신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는데, 러시아의 침공에 당당히 맞서는 그의 모습을 두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찰리 채플린이 윈스턴 처칠로 변한 것 같다"고 했어요. 코미디언에서 리더십을 갖춘 정치 지도자로 변모했다는 거지요. 이처럼 위기 상황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지도자는 누가 있을까요?

용기와 유머로 국민 격려한 처칠

2002년 영국 방송사 BBC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인'을 선정했는데요.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과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건 처칠이었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며 국민을 독려한 것으로 유명하죠.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영국·프랑스의 대(對)독일 선전포고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어요. 이듬해 5월 처칠을 중심으로 전시 내각이 꾸려졌습니다. 그는 취임 직후 유명한 연설을 남겨요. "내가 (국민에게) 드릴 수 있는 건 피와 땀, 수고, 눈물밖에 없습니다." 이 연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국 국민들을 크게 단합시킨 힘이 됐어요.

프랑스의 함락으로  케르크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고립됐을 때, 처칠의 지휘 아래 약 열흘간 850여 척의 개인 요트·유람선·어선 등 온갖 배들이 동원돼 군인들을 케르크에서 철수시킵니다. 이후 영국의 사기는 크게 오르게 돼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히틀러는 처칠에게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는 대신 영국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독일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처칠은 이 제안을 거부했어요. 실제 1941년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도 침공했어요. 국민의 희생을 담보로 전쟁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처칠의 결단으로 영국은 결국 승전국이 됐죠.

그는 재치와 유머를 갖춘 지도자로도 유명합니다. 1941년 처칠은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을 논의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합니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 ~1945) 미 대통령은 그의 방에 예고 없이 들어가요. 목욕 후 수건만 두르고 있던 처칠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루스벨트에게 "보시다시피 우리 영국인은 미국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간절히 바라던 상황이었고, 루스벨트는 처칠의 솔직한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고 해요. 이후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게 됩니다.

'자유 프랑스'의 상징 드골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도 불굴의 의지로 조국의 자유를 수호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인 샤를 드골(1890~1970)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드골은 국방차관이었는데요. 그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1940년 5월 계속 항전하며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는 걸 반대했어요.

하지만 당시 의회 결의로 전권을 위임받은 1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 페탱 장군이 6월에 히틀러와 휴전협정을 체결했어요. 사실상 프랑스의 항복이었죠. 그러자 드골은 영국으로 넘어가 망명 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어요. 그는 같은 해 6월 18일 런던에서 '프랑스인이여,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는 제목의 명연설을 남겼어요. 독일과 이탈리아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함께 싸우자며 프랑스인을 독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드골은 군인과 피란민들을 결집해 프랑스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시작합니다. 점차 드골의 활동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프랑스 본국에서 독일의 침략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레지스탕스를 결성해 독일 점령군에 저항했답니다. 드골은 1944년 파리가 해방된 후 임시정부의 주석이 돼 나치 협력자들을 청산했어요.

드골 사망 51주기를 맞은 지난해 11월 9일에는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재미있는 모습이 펼쳐졌는데요.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드골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그의 묘지를 참배하고 기리는 글을 남긴 거예요. 오늘날 드골은 프랑스 국민으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이랍니다.

대공황과 전쟁서 고군분투한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4선 임기를 수행한 미국의 유일한 대통령입니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위기 속에서 미국을 안정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죠.

그는 경제 부흥을 위해 정부가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뉴딜 정책'을 실시했는데요.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총 30여 번의 대국민 담화 라디오 방송으로 새로운 정책과 국제 정세를 설명하며 불안에 떠는 미국 국민을 안심시켰어요. 방송이 시작되면 국민을 향해 "좋은 밤입니다. 친구들…"이라 부르며 친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죠. 라디오 방송으로 대통령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미국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졌다고 해요.

1921년 하반신 마비를 겪은 루스벨트는 걷는 게 불편했는데도 사람들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는 걸 원치 않아 휠체어를 거의 타지 않고 지팡이를 짚었습니다. 국가 원수로서 책임감을 갖고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적 역경과도 싸운 거예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의 이런 명언에서 어려움을 딛고 미국을 구해낸 지도자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국가를 버리고 도망친 대통령]

지난해 8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을 때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국민을 두고 도피해 국제사회의 빈축을 샀어요. 주인 없는 대통령궁은 결국 탈레반의 손에 넘어갔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부는 사라졌죠. 그는 현재 가족들과 아랍에미리트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과 대조를 이루며 요즘도 종종 언론에서 언급되고 있답니다.

영국 런던의 라디오 방송 마이크 앞에서 연설하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 /위키피디아
영국 런던의 라디오 방송 마이크 앞에서 연설하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 /위키피디아
지난 13일(현지 시각)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수도 키이우의 한 병원에서 입원 중인 부상병과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에요. /AFP 연합뉴스
지난 13일(현지 시각)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수도 키이우의 한 병원에서 입원 중인 부상병과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에요. /AFP 연합뉴스
윤서원·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