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1100여년 전 세워진 '루스의 나라'… 두 국가의 뿌리 됐죠
입력 : 2022.02.23 03:30
키예프 루스
- ▲ ①2016년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 옆 광장에 세워진 17m 높이의 동상. 동슬라브족 최초의 국가‘키예프 루스’를 통치했던 블라디미르 대공이에요. ②1899년 루 스인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루스는‘항해술이 뛰어난 사람’을 뜻해요. ③키예프 루스를 통치한 스뱌토슬라프. ④어린 스뱌토슬라프를 대신해 섭정을 한 어머니 올가. /위키피디아
지난해 7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은 모두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고대 '루스'의 후손이다"라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여기서 '루스'는 키예프 루스를 의미해요. 이처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를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키예프 지역을 '러시아의 뿌리'라고 여겨요. 우크라이나인들도 자신들을 키예프 루스의 후손이라고 생각해요. 우크라이나에서는 지난해 국가명을 '루스 우크라이나'(Rus-Ukraine)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어요. 키예프 루스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10년간 영토 확장한 '키예프의 광개토대왕'
키예프 루스는 슬라브족 중에서도 동슬라브족이 세운 국가예요. 루스는 항해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의미인데요. 오랜 세월 이웃의 다른 민족들과 싸우며 동슬라브족은 단결하게 됐고, 9세기 초 키예프 루스의 영토는 동슬라브족의 거의 절반을 통합할 정도로 커지게 됐어요.
그런데 9세기 중엽 이 땅에 바이킹이라는 새로운 민족이 나타납니다. 바이킹의 지휘자 중 한 명인 올레크는 부하들과 함께 키예프를 점령하고, 대공이 돼 본격적으로 국가 기틀을 마련해요. 하지만 키예프 루스는 단일국가가 아니라 여러 공국이 연합한 형태였어요. 통합이 강화되는 데 있어 이후 여러 대공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요.
그 첫 번째 인물이 스뱌토슬라프였어요. 그는 주변의 많은 지역을 정복한 군주로 유명해서 '광개토대왕'에 비유되기도 해요. 스뱌토슬라프는 아버지가 다른 부족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어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인 올가가 섭정했는데,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는 귀족들에게서 아들을 보호해줬죠. 그는 962년 실권을 잡으며 정치 전면에 등장합니다. 스뱌토슬라프는 궁보다 전쟁터에 있는 날이 더 많았을 정도로 '전쟁의 왕'이었습니다. 10년간 수많은 전투와 전쟁을 치르며 키예프 루스의 영토를 크게 넓혔어요. 동쪽으로 볼가강과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죠.
968년부터는 발칸반도도 공격했어요. 불가리아 왕국의 득세를 우려한 비잔틴제국 황제의 요청으로 불가리아 왕국을 공격해 수도를 장악했죠. 발칸반도를 무척이나 맘에 들어 했던 스뱌토슬라프는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려고까지 했다고 해요. 하지만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키예프가 세력을 넓히려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어요. 결국 한때 동맹을 맺었던 사이었지만 두 국가 간 전쟁이 벌어집니다.
패자는 스뱌토슬라프였어요. 971년 키예프 루스는 크림반도와 발칸반도를 모두 포기하고 비잔틴제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비잔틴제국과 강화해요. 키예프로 돌아가던 스뱌토슬라프는 다른 부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는데, 승리자들은 자신들의 고유 풍습에 따라 스뱌토슬라프의 해골에 금을 입혀 술잔을 만들었다고 해요.
비잔틴제국에서 그리스정교 받아들여
전사한 스뱌토슬라프의 막내아들이 바로 블라디미르 대공입니다. 그는 통치자로서 키예프 루스를 정치·문화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죠.
그의 치세 때 벌어진 중요한 일을 하나 꼽자면 비잔틴제국에서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인 거예요. 그리스정교는 가톨릭·개신교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3대 종파로 꼽히는데요. 블라디미르는 989년 비잔틴제국의 공주 안나와 결혼하면서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이고, 백성들도 이 종교를 믿게 했어요.
이 시기 그리스정교의 영향으로 교회슬라브어인 키릴문자가 개발됐고, 향후 건축과 예술이 한층 발전하는가 하면 법률이 진화하는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블라디미르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후 백성들의 삶을 잘 살피고 도덕적인 생활을 했다고도 해요.
혼인 정책으로 유럽과 교류
키예프 루스는 블라디미르의 아들 대에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1036년 블라디미르의 여섯째 아들이었던 야로슬라프가 다른 형제들과의 치열한 전쟁 끝에 통치자로 등장했어요. 그는 수많은 그리스 서적을 독파하며 '현자'로 불렸던 인물이에요.
그는 잇따른 지역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고 주민들을 엄격하게 다스렸어요. 한편으로는 영토 확장과 안정에도 힘을 썼죠. 대외적으로는 유럽 여러 왕실을 대상으로 혼인 정책을 취하며 국제적 지위를 공고히 했어요. 야로슬라프 자신도 스웨덴 공주와 결혼했고 세 딸을 노르웨이·헝가리·프랑스 왕에게 시집보냈어요. 세 아들은 유럽의 공주들과 결혼시켰죠.
야로슬라프는 최초의 법전을 제정하고 수많은 학교와 도서관을 세우는 등 교육·문화 발전에 앞장섰어요. 수도 키예프는 수공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키예프의 중심부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소피아 대사원이 세워지기도 했죠. 또 교회를 비잔틴교회에서 독립시키고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며 지금의 러시아 정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했어요
하지만 야로슬라프의 손자이자 비잔틴제국 황제의 외손자였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치세를 끝으로 키예프 루스는 내리막길을 걷게 돼요. 12세기 초 키예프 루스는 몇몇 독립된 공국으로 분열됐고, 각 공국의 공후가 자신의 공국을 다시 아들들이나 형제들에게 나눠 주면서 여기저기 소공국이 생겨났죠.
무역로의 변화도 쇠락의 요인 중 하나였어요. 11세기 이후 유럽과 소아시아, 유럽과 비잔틴제국을 잇는 무역로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유럽에서 성장한 이탈리아 상인들이 지중해를 통해 비잔틴제국과 소아시아와의 무역을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키예프를 거쳐 갈 필요가 없어졌고, 상업 중심지로서의 키예프 지위도 약화됩니다. 이후 키예프 루스는 1240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프랑스가 미개하다고?]
야로슬라프의 딸인 안나는 프랑스 국왕이었던 앙리 1세에게 시집을 갔는데요. 그녀는 18살 때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등을 구사했다고 전해져요. 안나는 1060년 앙리 1세가 세상을 떠나고 7살인 아들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6년간 섭정으로 프랑스를 통치합니다.
안나가 1050년 키예프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제가 와 있는 나라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몰라요. 주택은 칙칙하고, 교회는 끔찍하고, 문화는 미개해요"라는 내용이 등장해요. 당시 키예프 루스의 높은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프랑스는 그 이후인 12세기부터 문화적 전성기를 이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