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이슬람·유럽 문화 융합한 '튀르크 정신' 되살린대요

입력 : 2022.02.16 03:30

터키와 튀르크 민족

①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어요. 메메트 2세가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는 모습. ②아흐메트 1세 때 아라베스크 무늬의 푸른색 타일 2만1000장으로 장식해 세운‘블루모스크(사원)’. ③술레이만 1세. /위키피디아
①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어요. 메메트 2세가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는 모습. ②아흐메트 1세 때 아라베스크 무늬의 푸른색 타일 2만1000장으로 장식해 세운‘블루모스크(사원)’. ③술레이만 1세. /위키피디아
최근 터키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사용하는 공식 나라 이름을 '튀르키예'(Türkiye·튀르크인들의 땅)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요. 터키라는 국명이 자국의 전통적인 가치와 문화를 반영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거예요. 영어 단어 '터키'(Turkey)는 칠면조라는 뜻뿐 아니라 '멍청한 사람' '겁쟁이'라는 뜻도 있어 국제사회에서 혼동을 일으키고 국가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다는 것도 국명을 바꾸는 이유래요. 그렇다면 터키는 왜 '튀르키예'라는 이름을 쓰려는 것일까요?

 10세기 터키 땅 일대에 셀주크 튀르크 세워

튀르크족(族)은 터키인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는 민족이에요. 튀르크는 725~735년 몽골의 오르혼강 주변에 세워진 오르혼 비문(碑文)에 쓰인 용어인데, '방패' '힘센'이라는 뜻의 '튀릭(Türük)'에서 나온 말이에요. 중국에서는 튀르크족을 '갑작스럽다'의 돌(突)자와 '오랑캐'의 궐(厥)자를 써서 '돌궐'이라고 불렀어요. 이는 '날뛰는 오랑캐 족속'이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튀르크족을 낮춰 부른 이름이에요. 삼국시대 고구려가 중국의 수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던 돌궐이 바로 튀르크족이랍니다.

이들은 원래 몽골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했어요. 6세기 튀르크족을 이끌던 부민은 몽골의 또 다른 유목 민족 유연의 지배에서 벗어나 552년 튀르크족 최초의 나라를 세웠는데요. 터키는 이해를 건국의 해로 기념하고 있죠.

부민이 죽은 후 튀르크 제국은 아들 무칸이 다스리는 동부 지역과 동생 이스테미가 다스리는 서부 지역으로 나뉘었어요.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자식과 친척들이 재산을 나눠 갖는 유목 민족의 전통에 따랐던 거예요. 그렇게 동부 지역은 동튀르크 제국으로, 서부 지역은 서튀르크 제국으로 발전했죠.

동튀르크는 유목 민족의 전통을 유지하며 불교를 믿다가 몽골(원)의 지배를 받았어요. 서튀르크는 아바스 왕조의 지배 아래 이슬람교를 믿으며 일부가 서쪽으로 계속 이동했고, 10세기에 '셀주크 튀르크 제국'을 건설했어요. 이곳이 오늘날 터키 땅 일대입니다.

동서양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번영

셀주크 튀르크는 창시자 셀주크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제국이에요. 비단길로 유명한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출발해 페르시아(이란), 시리아, 예루살렘, 아나톨리아 일대에 걸쳐 있었죠.

그러다 11세기 후반 셀주크 튀르크 부족 중 한 분파가 로마 지역에 세워진 튀르크 국가라는 뜻의 '룸 셀주크'를 세웠어요. 룸 셀주크는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지배하고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크게 번영했답니다.

그러나 13세기 칭기즈칸(1162~1227)이 세운 몽골 제국이 서아시아를 거쳐 아나톨리아까지 밀려들었고, 룸 셀주크 곳곳의 도시를 초토화시켰어요. 각지의 튀르크족은 제국의 테두리에서 떨어져 나가 크고 작은 나라를 세웠는데요. 이 중 하나가 1299년 오스만이 세운 오스만 공국이에요.

오스만 공국은 유럽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합니다. 서쪽 비잔티움 제국의 발칸반도를 공격하고, 동쪽과 남쪽 아나톨리아에 있던 다른 튀르크 국가를 정복하면서 제국으로 발전했어요. 당시 유럽은 교황권이 약화된 가운데 국가 간 전쟁이 빈번했고,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였기에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장을 막을 수 없었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를 차지하며 동방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요. 에스파냐(스페인)와 포르투갈이 신항로 개척에 앞장서게 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다양한 민족·종교 공존 꾀한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1451~1481)는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며 이곳을 이슬람의 도시로 바꿔나가요. 그는 그러나 성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꾼 것처럼, 기존 건축물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에 맞춰 개조하는 유연성을 발휘했어요. 덕분에 비잔티움 시대의 모자이크화는 오늘날까지 잘 보존돼 있죠. 비(非)이슬람교도는 강제 개종시키지 않고, 특별 세금을 더 내게 했어요. 제국 내에 다양한 민족과 종교의 공존을 꾀한 거예요. 이런 포용 정책은 이후 오스만 제국이 600년을 더 이어나가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술레이만 1세 때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으로 성장했어요. '술레이만'은 지혜의 왕 '솔로몬'의 튀르크식 발음이랍니다. 그는 다양한 언어·종교·풍습을 가진 제국민들이 공통으로 쓸 수 있는 법전을 만들고, 건축·그림·타일·직물 등 각종 예술 분야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어요. 그의 치세 동안 오스만 제국은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백성의 생활이 안정됐고, 수준 높은 문화도 꽃피었어요. 출신이나 계급과 상관없이 능력이 뛰어나거나 전공을 세우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죠.

"제국 내 모든 사람은 튀르크 민족"

그러나 17세기 오스만 제국은 쇠퇴 일로를 걷게 됩니다. 오스트리아·러시아를 비롯해 절대주의 국가로 성장한 유럽 여러 나라와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했고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발칸반도·이집트·아랍 지역의 많은 영토를 잃게 돼요. 전성기 때에 비해 영토의 40%, 인구의 20%가 줄었죠.

그러자 제국 내 세르비아·불가리아 지역등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그리스가 독립에 성공했죠. 술탄 아흐메트 3세는 위기 극복을 위해 개혁을 의미하는 '탄지마트'를 실시하는데요. 서구화를 목표로 경찰서·소방서 같은 공공기관과 도로·철도 등의 교통시설, 다양한 학교를 신설했어요. 술탄이 지배하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한 채 서구의 기술이나 제도만을 도입하려고 하며 근본적인 사회 개혁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이 시기 들어온 근대적인 사상은 민주주의 혁명의 토대가 됐죠.

오스만의 젊은 청년들은 두 차례의 입헌 혁명을 거쳐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어요. 이 가운데 튀르크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국민적 공감을 얻었는데요. "제국 내 모든 사람은 튀르크 민족이기 때문에, 이슬람과 유럽 문화는 튀르크 문화에 융합돼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두 차례의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 민족적으로는 튀르크인이라는 동질성이 더욱 강해졌어요. 1923년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튀르키예 줌후리예티(터키 공화국)'가 선포되고 '터키의 아버지(아타튀르크)'라고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이 제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오늘날의 터키가 됩니다.

[숨어있는 세계사] 이슬람·유럽 문화 융합한 '튀르크 정신' 되살린대요
정효진 양영디지털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