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삼국시대 때는 신분 따라 다른 모양 착용했어요

입력 : 2022.02.10 03:30

허리띠

①대구와 경주 등 영남 지역에서 출토된 호랑이 모양 띠걸이와 말 모양 띠걸이. ②경주 금관총에서 발견된 금허리띠와 드리개예요. ③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허리띠 장식. ④고구려 금동제 허리띠 장식. ⑤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었던 영친왕의 옥대. 옥으로 장식해 만들었어요. /국립대구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①대구와 경주 등 영남 지역에서 출토된 호랑이 모양 띠걸이와 말 모양 띠걸이. ②경주 금관총에서 발견된 금허리띠와 드리개예요. ③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허리띠 장식. ④고구려 금동제 허리띠 장식. ⑤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었던 영친왕의 옥대. 옥으로 장식해 만들었어요. /국립대구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시대를 초월한 명품, 허리띠

국립대구박물관은 오는 3월 27일까지 '한국의 허리띠' 특별전을 열고 있어요. 허리띠는 윗옷을 여미고 아래옷을 동여매는 데 쓰는 작은 소품이지만, 과거에는 그것을 매는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꾸미개의 하나였대요.

삼국시대 이전 우리 조상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그래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무덤이나 집터에서 출토된 유물을 바탕으로 추정할 수 있답니다.

호랑이·말 모양의 청동 허리띠걸이

각종 유적에서 발견된 허리띠는 금이나 은, 청동, 철 같은 금속으로 만든 띠걸이와 장식만 남아 있어요. 금속에 덧댄 가죽이나 직물은 썩어서 사라져 버린 거죠.

기원 전후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확인되는 허리띠걸이는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었는데요. 호랑이나 말 모양이 많아요. 두 동물이 용맹스러움이나 민첩함을 상징하고,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지금까지 110여 점의 동물 모양 허리띠걸이가 발견됐는데, 그중 15점이 호랑이 모양이고 나머지는 말 모양이라고 해요. 이런 청동 허리띠걸이는 그것을 만드는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형태를 만들기도 어려워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돼요.

호랑이 모양의 띠걸이는 대부분 호랑이 얼굴과 목·허리·엉덩이에 기하학적 무늬를 새겼는데요. 꼬리를 엉덩이 위쪽으로 둥글게 말아 올린 모양이에요. 영남 지방의 지배자 무덤에서 자주 출토되고 있죠. 말 모양 띠걸이는 주로 다리를 쭉 펴고 선 말의 옆모습을 하고 있어요. 긴 목에는 갈기가 휘날리고, 허리는 잘록하며 엉덩이에 있는 짧은 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죠. 경주나 영천뿐 아니라 청주·천안·아산 등 중서부 지방에서도 종종 발견되며, 천안 청당동 무덤에서는 15점이나 되는 말 모양 띠걸이가 나란히 줄지어 출토되기도 했어요.

신기한 물건 주렁주렁 달린 금허리띠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허리띠로는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에서 출토된 '금허리띠'가 있어요. 황금의 나라로 불린 신라에서는 머리에 쓰는 금관과 함께 순금으로 허리띠를 만들었어요. 현재까지 6점의 금허리띠가 발견됐는데,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비단벌레 날개를 이용해 화려하게 장식한 금동제 허리띠가 출토되기도 했어요.

신라의 허리띠는 여러 장치와 장식으로 구성돼 있어요. 우선 가죽과 천으로 띠를 만들고 그 위에 사각형 판이나 하트 모양 장식을 붙인 '띠꾸미개'가 있고요. 버클처럼 허리띠를 죄어 고정하는 장치인 '띠고리', 띠고리 반대편 끝에 붙이는 '띠끝장식' 등이 있지요.

이 중 특히 재미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건 허리띠에 각종 장식품을 늘어뜨린 '띠드리개'예요. 여기에는 숫돌이나 족집게·손칼·약통·향주머니·물고기·굽은옥 등 여러 신기한 물건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요. 숫돌과 족집게는 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연장 '단야구(鍛冶具)'를 형상화한 것이고요,약통은 질병의 치료를, 물고기와 굽은옥은 다산(多産)이나 풍요·영생을 상징한답니다. 이런 띠드리개는 북방 유목 민족이 초원에서 이동 생활을 하며 작은 연장들을 허리에 차고 다녔던 풍습에서 유래했어요.

신라 금허리띠의 평균 길이는 111㎝로 43인치 정도예요. 우리나라 성인 남성의 평균 허리둘레가 82.9㎝, 여성은 78.6㎝인 점을 고려하면 엄청나게 긴 거죠. 또 허리띠에 매단 드리개 무게는 1㎏이 넘는다고 해요. 6점의 금허리띠 모두 무덤 주인의 허리 부근에서 발견됐는데요. 이것을 보면 신라의 금허리띠는 실제 사용한 생활용품이라기보다 죽은 사람의 수의(壽衣)를 두른 장례용품으로 짐작돼요. 무덤 주인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는 역할을 한 거죠. 황남대총 북분의 은제 허리띠에는 왕비의 허리띠를 가리키는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남아 있어요. 이를 통해 여성도 허리띠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죠.

거꾸로 된 하트 모양 허리띠 장식

100여 년간 유행하던 금허리띠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는 6세기 무렵 점차 사라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데요. 신라는 넓어진 영토와 늘어난 국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법흥왕 7년 때 '율령(律令)'을 반포하는데, 신하들이 입는 옷에 대한 규정도 포함돼 있었어요. 관료들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자주색(紫), 붉은색(緋), 파란색(靑), 노란색(黃) 등 지정된 색깔의 '관복(官服)'을 입어야 했죠.

이 시기를 전후해 거꾸로 된 하트(역심엽형) 모양 장식이 달린 허리띠가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은으로 만들어진 이런 허리띠 장식은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한 부여 지역 고분이나 절터에서도 종종 출토되는데요. 백제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16관등제를 완비하고, 귀족과 관료를 서열화하면서 그에 따른 옷이나 허리띠 모양을 새롭게 규정했어요. 고대사회에서 허리띠는 신분의 차이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인 소품이었던 거예요.

고구려의 허리띠 장식은 띠를 꾸미는 용이나 풀잎 모양으로 장식된 네모난 장식판, 그 아래 고리로 연결된 하트형 장식판, 금실을 매단 달개장식 정도만 발견됐어요. 하지만 고구려에는 '왕만이 다섯 가지 색깔(오채·五綵)의 옷을 입고, 하얀 비단으로 만든 관(冠)을 쓰며, 가죽띠에 금테를 두른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고구려왕 역시 금으로 장식한 허리띠를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하늘이 내려준 신라의 옥허리띠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즉위한 첫해(579년)에 하늘의 천사가 왕궁에 내려와 옥허리띠(옥대·玉帶)를 주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요. 그 뒤 왕은 종묘를 비롯한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낼 때 항상 이 옥대를 찼대요. 왕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한 설화죠.

진평왕의 옥대는 신라 3대 보물(삼보·三寶) 중 하나였대요. 신라의 삼보는 황룡사 9층탑, 황룡사 장륙존상, 진평왕의 옥대를 의미해요. 937년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이 옥대를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치는데요. 망국의 군주가 신라라는 국가 전체를 고려에 바치는 의식을 행하면서 옥대를 상징물로 활용한 거예요. 조선 왕실에서 옥대는 왕과 왕세자만이 맬 수 있었답니다.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