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무대서 빛나는 아역 배우… 전담 스태프가 도와준대요
입력 : 2022.02.07 03:30
[샤프롱 제도]
아동 청소년 인권 보호 위해 도입
우리나라도 2014년 이후 보편화
빌리 엘리어트엔 6명이 30명 챙겨요
- ▲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아역 배우인 주인공 빌리가 아버지 앞에서 발레를 하는 모습. /신시컴퍼니
이 장면에서 빌리는 24회 연속 회전을 하고 노래를 한 뒤, 다시 고난도의 애크러배틱(곡예)과 12회의 회전을 합니다. 이 숨 가쁜 안무에서 춤에 대한 빌리의 꿈과 열정이 폭발한 거지요. 작은 아역 배우의 몸으로 무대를 누비며 발레·힙합·무술까지 표현하는 빌리의 몸짓에 관객들의 박수가 쏟아집니다.
이 작품은 2000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가 원작이에요. 유명 뮤지션 엘턴 존(1947~)의 제안으로 2005년 뮤지컬로 제작됐죠. 영국에서 초연되던 해, 영국의 토니상으로 불리는 로런스올리비에상 4개 부문을 수상하고 2009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 10개 부문을 휩쓸 정도로 화제를 모았어요. 1980년대 영국 탄광촌을 배경으로 발레리노의 꿈을 이뤄가는 한 소년의 성장기를 아름답고 따뜻하게 담아내고 있답니다.
1980년대 중반 영국 시대상 녹아있어
빌리는 영국 북부 탄광 마을에 살아요. 우연히 마을의 복지센터에서 발레 수업을 접하는데, 발레 선생님이 빌리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죠. 하지만 거친 광부들의 세계 속에서 빌리의 아버지도, 형도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것을 반대했죠. 빌리는 갈등과 좌절을 겪어요. 하지만 빌리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진심을 알게 된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영국 최고의 발레 스쿨에 합격하게 됩니다.
이 작품에는 당시 영국의 시대상이 그대로 녹아 있어요. 광부였던 빌리 아버지와 형 그리고 탄광 마을 사람들은 작품 속에서 파업을 하게 되는데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대 중반 영국 탄광 파업은 영국 노동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에서는 국가의 재건을 외치며 노동당이 집권하게 돼요. 황폐해진 국토 건설과 국민 생존을 위해 사회보장제도 정책을 내세웠죠. 이 시기에 노동조합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비대해진 노조와 반복된 파업으로 국민의 불만은 쌓여갔어요. 결국 장기간의 경기 침체에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한 노동당은 1979년 총선에서 보수당에 패하고 맙니다.
이때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마거릿 대처(1925~2013)가 수상이 되면서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국유 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대처리즘(Thatcherism)'정책을 실행해요. 그런데 민영화 과정에서 경제성이 떨어진 탄광의 폐쇄와 인력 감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석탄산업 합리화안'이 발표되자 전국광부노동조합이 1984년 봄 전면 파업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 파업에 빌리의 아버지와 형도 참여하게 된 거예요. 파업은 실패하고 탄광 공동체는 무너지지만, 고난 속에서도 빌리의 꿈을 돕기 위한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마침내 빌리는 자유의 날갯짓을 펼치죠.
아역 배우의 무대 뒤 보호자 샤프롱
이 뮤지컬의 주인공 빌리 역은 배우 인생에서 단 한 번만 도전할 수 있는 캐릭터예요. 빌리가 되기 위해서는 만 8~12세의 나이에 150㎝ 이하의 키, 변성기가 오지 않고 춤에 재능 있는 남자 어린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죠.
선발 후에도 '빌리 스쿨'이라 불리는 곳을 통해 발레, 탭댄스, 애크러배틱, 현대무용, 필라테스, 노래, 연기 등의 훈련을 받아야 해요. 이 과정을 거치고 공연하기까지 2년여 시간이 또 필요하답니다. 이 뮤지컬에는 빌리뿐 아니라 친구 마이클, 데비 그리고 마을의 귀염둥이 스몰보이와 발레걸스 등 30여 명의 아역 배우가 등장하기도 하죠.
최근엔 아역 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공연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뮤지컬 '마틸다' 역시 주인공 마틸다를 비롯해 많은 아역 배우가 등장해요. 이렇게 무대에 서는 아역 배우들을 돌봐주고 보호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을 '샤프롱(chaperon)'이라고 불러요. 샤프롱의 어원은 프랑스어로, 과거에는 젊은 여성이 사교장에 나갈 때 따라가 보살펴주던 사람을 의미했어요. 현대에 들어서는 공연계에서 아역 배우만 관리하는 전담 스태프를 부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뮤지컬로 유명한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 등에서는 아동과 청소년 인권 보호를 위해 오래전부터 반드시 샤프롱을 두도록 강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뮤지컬 '원스'를 시작으로 샤프롱 제도가 자리 잡았어요. 당시 샤프롱은 여주인공의 딸 '이반카'를 연기하는 아역 배우를 도와 음악과 연기 지도도 했답니다. 이후 뮤지컬 '킹키부츠' '모차르트!' '레미제라블' '서편제' 등 아역 배우가 출연하는 많은 뮤지컬이 샤프롱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빌리 엘리어트'에도 6명의 샤프롱이 30명의 아역 배우와 함께하고 있어요. 뮤지컬의 '스몰보이'로 출연하는 김민준 배우는 올해 여덟 살로 출연 배우 중 가장 나이가 어린데요. 늘 함께 있어주고 챙겨주는 샤프롱 덕분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뮤지컬 무대가 무섭지 않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어요.
의상·소품 챙기고 간식 주며 응원
아직 국내에서는 샤프롱의 자격 조건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진 않아요. 하지만 아동학을 공부하고 공연 무대에 대한 이해력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겠죠. 영국에서는 샤프롱 채용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어요. 샤프롱 자격을 얻어도 3년마다 지역 행정 당국의 인증을 새롭게 받아야만 하죠.
공연 연습이 시작되면 샤프롱은 어디든 아역과 동행해요. 부모는 연습실, 분장실, 백스테이지에는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샤프롱이 아역을 보호하죠. 연습 중에는 함께 대본을 맞추며 대사를 외웠는지 확인하고, 아역 배우의 기분은 어떤지 물으며 무대 공포증을 이겨낼 수 있게 돕습니다. 또 무대 위 에티켓도 가르치고요. 무대를 마친 뒤 오늘 공연이 어땠는지 모니터링을 해 주고, 등·퇴장은 물론 의상과 소품을 챙기는 것도 샤프롱의 몫이에요. 1막에서 격한 춤을 소화해 낸 빌리가 2막에서도 최고의 공연을 선보일 수 있도록, 쉬는 시간(인터미션)에 빌리의 다리를 마사지해 주기도 한답니다. 간식을 주며 응원도 해주죠. 공연이 끝난 뒤에는 부모에게 아이들을 인계하고 다음 날의 일정을 공지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해요. 샤프롱 덕분에 아역 배우들은 안전하고 즐겁게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이죠.
- ▲ 2011년 뮤지컬 마틸다의 영국 웨스트엔드 공연 당시 포스터. /위키피디아
- ▲ 무대 뒤에서 아역 배우(오른쪽)의 분장을 도와주는 샤프롱.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