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단두대에서, 붉은광장에서… 혁명이 뒤바꾼 두 사람의 삶

입력 : 2022.01.26 03:30

루이 16세와 레닌

①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절대왕정의 상징과도 같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어요. 사진은 18세기 익명의 화가가 그린 습격 당시의 모습이에요. ②1917년 3월 4일 러시아 붉은광장의 혁명군 퍼레이드. ③스무 살의 루이 16세 초상화. ④블라디미르 레닌. /위키피디아
①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절대왕정의 상징과도 같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어요. 사진은 18세기 익명의 화가가 그린 습격 당시의 모습이에요. ②1917년 3월 4일 러시아 붉은광장의 혁명군 퍼레이드. ③스무 살의 루이 16세 초상화. ④블라디미르 레닌. /위키피디아
1월 21일은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두 인물이 사망한 날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이에요. 루이 16세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군주제가 폐지되며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어요.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레닌은 뇌졸중을 앓다 1924년 1월 21일 세상을 떠났죠. 전혀 다른 시기를 살았던 두 사람이지만, 모두 혁명과 연관돼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한 사람은 혁명으로 목숨을 잃고, 한 사람은 혁명으로 국가 최고의 자리에 올랐죠. 특히 레닌의 시신은 아직도 러시아 '붉은 광장'에 보존돼 있어요. 두 인물의 삶과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볼까요?

바스티유 감옥 습격 때도 사냥 즐겨

루이 16세는 1743년 프랑스의 왕세자였던 루이 페르디낭과 마리 조제프 공녀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본명은 '루이 오귀스트'였죠. 그는 아버지가 왕세자였고 형까지 있었기 때문에 왕위는 멀어 보였어요. 그런데 아버지와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며 그는 예상치 못하게 왕세자에 책봉됐어요. 당시 불과 열한 살 나이였죠. 따라서 그는 왕세자에 걸맞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정치가 아닌 사냥과 자물쇠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야생동물을 사냥하지 못하는 날에는 온종일 풀이 죽어 있었다고 해요.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정치에 관심이 없고 우유부단하다'는 평이 빠짐없이 등장해요. 실제 그는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할지도 몰라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루이 오귀스트는 1774년 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사망하며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그는 왕으로서 일관성 없는 정책을 보여줬어요. 즉위 직후 진보적인 경제학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1727~1781)를 재정 총감에 임명했지만, 강력한 긴축 정책으로 궁중 신료와 귀족·성직자가 반발하자 직위에 오른 지 채 2년도 안 된 튀르고를 해임하기도 했죠.

당시 프랑스는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고 있었어요. 전쟁 비용 조달로 국가 채무가 늘어나자, 루이 16세는 세금 인상을 위해 귀족·성직자·시민 대표로 이뤄진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시민 대표는 신분별 표결이 아닌 머릿수 표결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귀족과 성직자가 이를 거부했고, 시민 대표단은 이에 반발해 1789년 6월 국민의회를 구성했죠.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승인했지만 한편으로는 국경에 있던 군대를 베르사유 궁전으로 집결시켰어요. 기근으로 굶주려 있던 파리 시민들은 배신감을 느꼈고, 같은 해 7월 14일 절대왕정의 상징과도 같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어요. 이때에도 루이 16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베르사유 궁의 숲속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었죠. 그가 쓴 그날의 일기에는 '오늘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후 루이 16세는 국민의회가 발표한 '인권선언' 승인을 미루다가 강제로 튀일리 궁에 갇히게 됐어요. 1791년 6월 20일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다가 국경 근처에서 붙잡혔죠.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면서 1792년 9월 등장한 국민공회가 왕의 처형 여부를 표결에 부칩니다. 혁명 완수를 위해 국왕이 사라져야 한다고 판단한 거예요. 387대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이 결정됐어요. 그렇게 루이 16세는 1793년 파리 콩코르드광장의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형 죽음으로 마르크스 사상에 빠진 레닌

그렇다면 반대로 혁명을 일으킨 레닌의 삶은 어땠을까요? 그는 1870년 러시아 볼가 강변의 소도시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어요.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입니다. 레닌은 혁명운동을 하며 사용했던 필명이었죠.

당시 러시아 인구의 대부분은 귀족 지주 밑에서 일하는 빈농이었어요. 그들 위로 절대군주인 차르가 군림하고 있었죠. 농민들은 지주 밑에서 죽을 때까지 일해야 했어요. 1891년 기근이 일어나 수많은 농민이 굶어 죽는 동안, 지주들은 엄청난 양의 곡물을 수출했죠.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레닌의 가족은 비교적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대요. 그런데 이 평온한 삶이 형의 죽음으로 크게 바뀌게 됩니다.

레닌과 그의 형은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우수하고 성실한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1887년 그의 형이 '차르 시해 모반 혐의'로 체포돼 교수형을 당하게 돼요. 그의 형은 최고 명문대였던 러시아 상트페트르부르크대의 자연과학대학에 진학했는데, 대학생 사이에 유행하던 반체제 사상을 받아들여 암살에 쓸 폭탄 제조 임무를 맡은 거예요.

형의 죽음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10대 후반이었던 레닌은 형에게 영향을 준 마르크스주의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는 몇 년에 걸쳐 마르크스 사상을 진지하게 탐구했어요. 대학생 때는 반체제 시위에 참여해 퇴학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법대를 졸업하고 만 스물세 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법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어요. 그는 곧바로 노동운동에 뛰어듭니다. 19세기 말 러시아는 산업혁명의 후발 주자로 공업을 급속히 성장시켜 나갔어요. 노동자가 많아지자 그는 공업 도시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했어요. 노동자들과 함께 모임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파업·공장법 등에 관한 쟁점을 담은 소책자를 만들어 공장 밖으로 배포하기도 했죠.

1900년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는데, 당 신문을 제작하려고 보안경찰의 감시를 피해 뮌헨·런던·제네바 등지에 숨어 살았어요. 그리고 이 무렵부터 '레닌'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레닌은 소수 혁명가가 폭력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세를 키워나갔어요. 이를 지지하는 사람을 '볼셰비키'(다수파)라고 불렀죠. 1905년 1월에는 노동자 20만명이 '하루 8시간 노동, 노동자 권리 인정' 등의 내용을 담은 탄원서를 들고 평화 행진을 했는데, 근위대의 발포로 많은 노동자가 사망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요. 농민과 노동자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고, 러시아 군대는 후퇴합니다. 도시에서 식량 배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이어지고,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지 못했어요. 처음부터 전쟁 반대를 외쳤던 레닌은 이 상황을 이용해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로 싸우다 망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어 그는 식민지의 해방 투쟁을 지원하겠다며 대중을 선동했고, 인기가 높아지면서 국제적인 혁명 지도자로 자리 잡게 됩니다.

결국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가 퇴위하고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으며 러시아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만들어졌어요. 1922년에는 러시아가 주변국을 정복하며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이 등장했죠. 하지만 레닌은 그가 만든 세계 속에서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계속된 내전과 전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건강도 악화하며 1924년 54세 나이로 삶을 마감했답니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