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그림 돋보기] 새해 건강 기원… 임금이 신하에게 호랑이 그림 나눠줬죠
입력 : 2022.01.03 03:30
호랑이 민화(民畫)
- ▲ ①호작도(호랑이와 까치를 같이 그린 그림). ②소나무 아래 호랑이. ③호피도. ④호랑이 무늬 가마덮개. /국립중앙박물관·이주은 교수 제공
무탈한 한 해 기원하며 그림 주고받아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 신하에게 새해를 맞아 한 해를 건강하게 보내길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그림을 나눠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세화(歲畫·새해 그림)'라고 불러요. 처음엔 궁중 풍속으로 시작돼 나중에 민간층으로 점차 확산됐지요. 새로운 한 해가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지나가길 바라며 그림을 주고받거나 악귀를 쫓기 위한 그림을 문짝에 붙여두곤 했지요. 그래서 세화를 문배(門排) 또는 문화(門畫)라고도 불렀답니다.
호랑이는 용과 함께 세화로 자주 그려졌어요. 당시 사람들은 호랑이를 두렵고도 용맹스러운 존재, 신성한 존재로 여겼거든요. 호랑이처럼 용맹스러운 동물이 우리를 지켜준다면 세상에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그래서 호랑이해가 아니더라도 호랑이 그림을 세화로 많이 그렸어요. 민화가 유행했던 19세기 무렵에는 궁중 밖에서도 서민들이 신년을 맞아 호랑이 그림을 주고받았답니다.
장수 기원하며 소나무와 등장
서민들이 즐겼던 민화에서 호랑이는 어떤 존재로 등장할까요? '작품2'에서 호랑이는 오른쪽에 보이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어요. 소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솔잎을 유지하죠. 그래서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어요.
이 그림은 호랑이가 나쁜 일을 막아주는 가운데 소나무처럼 오래오래 살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두 눈썹이 강조되고 상대적으로 코가 작게 표현된 호랑이의 얼굴은 마치 사람처럼 느껴지는군요.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지만, 무시무시하다기보다 점잖은 사람의 느낌을 주지요. 호랑이를 가까운 존재로 그리기 위해 의인화를 한 거예요.
호랑이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새도 있어요. 까치입니다. 19세기에는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그려졌어요. 이런 그림을 통틀어 '호랑이·까치를 같이 그린 그림'(호작도)이라고 부릅니다.
민화에는 왜 까치와 호랑이가 함께 등장할까요. 우선 까치가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길조(吉鳥)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호랑이가 집안의 나쁜 일을 막아 주고, 까치가 날아들어 즐거운 소식을 물어다 준다는 거지요. 그래서 새해뿐 아니라 평소에도 까치호랑이 그림을 집에 걸어 놓는 사람이 많았어요.
우리 사회를 풍자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어리석지만 힘은 강한 호랑이를 지배층으로, 슬기롭지만 힘없는 까치를 백성으로 여긴 거예요. 서민들은 까치호랑이 그림을 보며 지배층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길 원했을 듯 합니다.
'작품1'을 볼까요? 붉은 입 사이로 호랑이의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있네요. 그런데 그다지 무서워 보이지는 않아요. 오히려 재미있게 생겼네요. 눈은 툭 불거지게 크고 발은 발톱을 감춘 채 뭉툭해요. 오른쪽 나뭇가지에 앉은 까치는 호랑이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고 있어요. 호랑이 앞인데 전혀 긴장하지 않고 꼬리를 당당하게 치켜세운 모습이네요. 동물의 왕 호랑이를 바보 취급하며 놀리는 듯 보이지 않나요? 호랑이는 그만 놀리라는 듯 까치에게 짜증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네요. 강자와 약자가 바뀐 듯한 모습이지요.
잡귀 쫓으려 담요에 호피 그리기도
호랑이 가죽을 펼쳐 놓은 듯한 그림도 있어요. 이런 호피 그림은 주로 병풍에 그려졌어요. '작품3'을 보세요. 누런 바탕에 호랑이 털 무늬를 섬세하게 묘사했지요. 같은 그림이 가로로 펼쳐지며 여러 차례 반복돼요. 단조로우면서도 박력이 넘치는 무늬가 보는 사람을 압도하네요. 예스러우면서도 현대의 미적 감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세련된 그림이라는 평을 받아요.
호피 무늬는 담요에 그려지기도 했어요. '작품4'는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담요입니다. 혼례를 마치고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마를 타고 가며 덮었다고 하는데요. 잡귀를 쫓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호랑이 무늬를 본 잡귀가 겁이 나서 접근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 담요를 딸에게 덮어준 어머니나, 이 담요를 덮고 어둑한 길을 가는 신부의 마음은 얼마나 든든했을까요.
이렇듯 우리나라 그림 속 호랑이는 사나운 맹수의 모습보다 주로 위엄 있고 근사한 이미지로 그려졌습니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는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했고요. 옛 사람들이 호랑이를 그저 동물로만 본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인간 세상의 복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때로는 신통력을 지닌 영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