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1만㎞ 건너온 서역의 흔적들… 신라와 이슬람의 만남
입력 : 2021.12.30 03:30
고대 한반도를 찾았던 이방인
- ▲ 통일신라시대 왕릉인 원성왕릉 봉토 인근의 무인 석상. 터번을 쓴 채 곱슬거리는 짧은 수염, 크고 깊은 눈, 큼지막한 매부리코를 한 모습이에요. /국립경주박물관
서역은 중국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흔히 오늘날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타림분지와 구소련, 중앙아시아인 서(西)투르키스탄 지역을 가리키지만 인도·중동·로마를 포괄하기도 해요. 이곳에서 온 유물을 통해 이국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전시랍니다.
경주에서 발견된 서역계 유리기
우리는 언제부터 서역과 교류했을까요? 삼국시대로 추정돼요. 1913년 경주 보문동에 있는 신라시대 합장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금으로 그린 선과 작은 금 알갱이로 장식한 화려한 금귀걸이가 출토된 거예요. 그런데 일반적인 동아시아 유물과는 제작 기법·양식이 달랐어요. 오히려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금속 공예품과 비슷했죠. 이때 처음으로 신라와 서역이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지요.
1921년에는 고대에 만들어진 경주의 고분(무덤) '금관총'에서 서역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제품이 발견됐어요. 금관총이라는 이름은 이 고분에서 금관이 발견되면서 붙여졌죠. 이후에도 5~6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의 무덤들에서 이국적인 유물이 줄줄이 발견됐어요. 점박이 무늬가 박힌 유리찻잔, 코발트 빛을 띤 유리그릇, 주둥이가 봉황 머리 같은 유리병 등 다양하답니다. 터키석이나 청금석 등 이국적인 보석으로 장식한 금팔찌 같은 화려한 유물도 있었어요.
학자들은 유리 제품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알아내려고 성분을 분석했어요. 황남대총 북분과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리잔은 이집트에서, 봉황 머리 모양의 유리병은 중앙아시아나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져 건너왔을 가능성이 제기됐어요. 원래 생산지에서 자그마치 1만㎞ 떨어진 경주에까지 전해졌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죠.
고대 한국인과 서역인의 첫 만남
그렇다면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언제 처음 푸른 눈의 외국인을 만나게 됐을까요?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서역계 외국인은 백제와 신라에 각각 불교를 전해준 마라난타(摩羅難陀)와 묵호자(墨胡子)예요. 마라난타는 호승(胡僧·서역의 승려)으로 표현됐어요. 선교사처럼 인도에서 출발해 중국을 거쳐 백제에 온 승려로 추정됩니다. 흑호자(黑胡子)로도 표기된 묵호자는 피부색이 검은 서역 계통의 승려라 할 수 있죠. 이들은 불교 사상뿐 아니라 건축·조각 같은 다양한 불교 문물을 함께 전해 줬어요.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서역인의 모습이 더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씨름을 하는 장면에서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커다란 매부리코를 가진 서역계 인물이 묘사돼 있지요. 장천 1호분에는 고구려에서 실제 공연한 각종 곡예와 놀이가 그려져 있는데, 32명의 등장인물 중 9명이 코가 큰 서역 계통 인물이에요.
신라에서는 왕궁이 있었던 월성 주변에서 터번을 쓴 '토우'(흙으로 만든 사람 등의 상)가 출토됐어요. 발목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입고, 인도나 이슬람 사람들이 머리에 쓰는 터번을 머리에 둘렀죠. 이 모습이 당나라 때 고대 서아시아의 소그드인 복장과 매우 닮았다고 해요. 만약 소그드인이 맞는다면 당시 신라와 서역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거죠.
신라와 이슬람 세계의 교류
신라와 이슬람의 교류는 문헌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신라 흥덕왕 9년(834)에는 에메랄드, 공작의 꼬리 등 외국산 물품 사용을 제한하는 교서가 내려졌어요. 사치를 막기 위해서였죠. 동남아시아나 인도를 넘어 중앙아시아, 아프리카를 원산지로 하는 각종 사치품이 신라 사회에 퍼져 있었다는 뜻이죠.
일본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6세기 말부터 8세기 중엽까지 앵무·구관조·낙타 등의 동물이나 자단향 같은 향료·약품을 일본에 보내기도 했대요. 이를 수입해 일본에 되파는 중계무역을 했던 거예요. 당나라에 진출해 있던 소그드인이나 페르시아인들이 신라까지 들어와 외국산 동물·물품을 유통한 것으로 추정돼요.
신라인이 만든 서역인 이미지
경주의 무덤에는 서역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어요. 8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흙인형이 출토됐어요. 이 인형은 머리에 복두(幞頭·각이 지고 위가 평평한 관모)를 쓴 문관(文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덥수룩한 턱수염이 앞으로 뻗어 있고, 코와 입이 유난히 크게 표현되는 등 서역인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죠.
통일신라시대 왕릉인 원성왕릉 봉토에서 남쪽으로 110m 떨어진 지점으로 가 볼게요. 이곳에는 무인 석상 두 점이 세워져 있어요. 곱슬거리는 짧은 수염에 크고 깊은 눈, 큼지막한 매부리코에 터번을 쓰고 있어요. 같은 시기 중국 당나라의 무덤에서 출토된 서역인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해요. 그래서 이 무인상은 당시 정형화된 서역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서역인의 신라 방문을 입증하는 석상은 아닌 것으로 일부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경주에 서역인이 왕래한 걸 부정하긴 어려워요.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는 아라비아 상인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장보고도 해상을 주름잡으며 활약했기 때문이죠.
이들의 활약 덕에 신라가 이슬람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어요. 9세기 중엽에 쓰인 이슬람 책에는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황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와서 영구 정착한 이슬람교도들은 그곳의 여러 이점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요. 당시 신라인들은 서역인을 직접 만나 서역 문화를 접했을 거예요. 그로 인해 우리 고대 문화가 한층 더 다채로워졌음이 분명하지요.
[향가에 등장하는 처용과 서역인]
바다를 건너와 신라에 정착한 서역인이라고 하면 향가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處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이 설화에서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로 나와요. 생김새와 옷의 꾸밈새가 남들과 달라 신라인들에게 영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졌대요.
처용을 보는 견해는 다양해요.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기도 하고, 허구의 인물로 보기도 하죠. 그럼에도 처용은 고려·조선시대까지 전염병이나 잡귀를 물리치는 일종의 상징처럼 여겨졌어요. 이는 당시 서역인들을 전염병을 퇴치하는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로 여겼기 때문으로 추측돼요. 이들이 신라와 왕래하며 희귀한 약재를 들여와 여러가지 병을 낫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 ▲ 옛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의 무덤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 벽화. 서역계 인물이 샅바를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어요. /한성백제박물관
- ▲ 8세기 전반 만들어진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흙 인형. 코와 입 등 당시 서역인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요. /국립경주박물관
- ▲ 5~6세기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 /국립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