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언더스터디·앙상블·스탠바이… 숨은 주역들이죠

입력 : 2021.12.20 03:30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

연국‘더 드레서’의 한 장면. 노배우(배우 송승환·오른쪽)와 그의 의상을 담당하는 드레서(오만석)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에요. /국립정동극장
연국‘더 드레서’의 한 장면. 노배우(배우 송승환·오른쪽)와 그의 의상을 담당하는 드레서(오만석)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에요. /국립정동극장
한 편의 공연을 만들기 위해선 극장 곳곳에서 여러 역할을 맡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해요. 최근 무대 안팎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공연들이 무대에 올랐어요.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노배우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한 '드레서'의 이야기를 담은 '더 드레서(THE DRESSER)'라는 연극이 내년 1월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공연합니다. 드레서는 어떤 사람일까요? 공연에는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배우의 의상을 돕는 '드레서'

'드레서'는 배우의 의상을 담당하는 사람이에요. 연극은 '막'이라고 하는 장면으로 구성되는데, 하나의 막이 끝나면 보통 무대 조명을 잠시 끄고 다음 장면으로 전환할 준비를 하죠. 이 시간을 '암전'이라고 불러요. 배우들은 분장실로 가서 의상을 빠르게 갈아입고 다음 장면에 등장해요. 이때 배우에게 의상을 챙겨주고 옷을 갈아입는 걸 돕는 사람들을 '드레서'라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연극 '더 드레서'를 쓴 희곡작가 로널드 하우드는 실제로 극단에서 드레서로 일을 했다고 해요. 그가 겪은 생생한 경험은 연극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죠. 많은 관객들은 이 연극을 통해 무대에선 보이지 않는 드레서의 역할에 대해 알게 됐어요.

연극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셰익스피어 작품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이 공연을 하는 영국 어느 지방 공연장의 분장실이에요. 이 극단의 노배우는 평생 연기해온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227번째 준비 중이죠.

그런데 갑자기 이 노련한 노배우가 "대사가 기억이 안 나!"라고 소리 지르며 당황스러워하고, 분장실은 비상 상황이 됩니다. 무대 감독과 다른 배우들은 공연을 취소하기로 하지만, 노배우 옆에서 16년간 그의 의상을 챙겼던 드레서 노먼은 배우가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상황을 수습해 나가요. 전쟁 상황 중에 극장을 찾은 관객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죠.

폭탄이 터지고 공습경보가 울리는 상황에서도 관객과 약속한 공연을 이어나가려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이야기는 코로나 때문에 오랫동안 공연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현재 극단들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어요.

주·조연을 빛나게 해주는 '앙상블'

무대 위에는 주·조연 배우 외에도 앙상블(ensemble)들이 함께 올라요. '앙상블'이란 말은 주로 음악에서 합주나 합창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데, 연극에선 배우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을 뜻해요. 뮤지컬에서는 주·조연을 제외한 여러 단역이나 주연 뒤에서 노래하는 코러스, 춤을 추는 무용수 등 조화로운 장면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배역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주인공을 빛내주는 앙상블의 꿈과 도전을 담은 뮤지컬도 있어요. '코러스 라인'이라는 작품으로, 평소 주연의 그늘에 가려 노래하는 앙상블이라는 배역을 전면에 내세웠지요. 197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후 1990년까지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을 기록한 작품이에요. 초연한 해 토니상 최우수뮤지컬, 극본, 작곡, 작사, 연출, 안무, 조명, 남녀 주인공 등 총 9개 부문을 휩쓸 정도로 작품성도 인정받았지요.

이 뮤지컬을 연출하고 안무를 맡은 마이클 베넷은 주인공에게 가려진 코러스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작품을 구상했어요. 언젠가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기 위한 코러스들의 노력으로 공연은 더욱 완벽한 하모니로 빛나게 됩니다.

배우들의 여러 이름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도 역할에 따라 얼터네이트(alternate), 언더스터디(understudy), 스윙(swing)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요.

'얼터네이트'는 주연 배우보다 적은 회차의 공연을 맡아 무대에 오르는 배우를 의미하는데요. 한 주에 보통 10회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면 8회는 주연배우가, 2회는 얼터네이트 배우가 오르는 식이지요.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공연 당시 신인 김소현이 한 주에 2회 정도 공연을 하는 얼터네이트로 참여했는데 큰 호응을 받아 지금은 대표 뮤지컬 여배우가 됐어요. 2010년 뮤지컬 '모차르트!' 국내 초연 당시 가수 조성모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는데 발목을 다쳐 출연이 무산된 일이 있었어요. 그때 김준수(시아준수)로 주연 캐스팅이 변경됐고, 그의 얼터네이트로 박은태 배우가 무대에 서게 됐어요. 지금은 박은태 배우도 주연으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지요.

'언더스터디'는 평소엔 앙상블로 무대에 오르다가 주·조연 배우가 공연에 서지 못하게 됐을 때 대신 무대에 올라가는 역할이에요. 갑자기 주연 자리를 거머쥐게 되는 이런 극적인 상황은 실제로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로 제작되기도 했지요. 영화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1973년 뮤지컬 '그리스'의 주인공 대니의 언더스터디로 데뷔해서 성공한 경우랍니다. 또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인 '미스 사이공'의 주인공 마이클 리의 언더스터디로 등장한 홍광호 역시 많은 뮤지컬 무대에서 주연으로 활약하고 있어요.

앙상블 배우 중 하나가 언더스터디로 가게 되면 그 자리를 메울 배우가 필요하겠죠. 그때 그 자리를 대체하는 역할을 '스윙'이라고 해요. 앙상블 중에서도 노련한 배우가 이 역할을 맡아요.

공연에 출연하지 않아도 대기하는 배우들은 '스탠바이(standby)'라고 불러요. 탄광촌에서 태어난 소년 빌리가 발레리노의 꿈을 키우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아역 배우들의 체력 소모가 상당하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스탠바이 빌리가 항상 극장에 나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요.

이렇게 공연은 주·조연뿐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의 배역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든답니다. 공연이 끝난 뒤 배우들이 차례차례 무대에 등장하는 '커튼콜' 시간에 그들에게 힘껏 박수를 보내보는 건 어떨까요.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