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소한 역사] 1994년 학력고사 대안으로 '수능' 도입… 첫해엔 여름과 겨울 두 번 쳤죠
입력 : 2021.11.16 03:30
대학 입시
- ▲ 1986년 11월 20일 서울 동성중학교에서 수험생들이 대입 학력고사를 치르는 모습. /연합뉴스
전근대 시기 고등교육기관 입학은 능력이 아닌 신분에 의해 결정됐어요. 지금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신라시대 국학(國學)에는 하위직 관등(계급)의 15~30세만 입학할 수 있었고, 고려 시대 국자감(國子監)에는 고위 관직자 자녀만 입학할 수 있었어요.
조선 시대의 국립대학인 성균관은 '사학(중·고교와 비슷) 학생 중 15세 이상으로 소학과 사서오경 중 하나에 능통한 자' 등을 뽑았어요. 성균관은 관리 양성기관 역할도 했기 때문에 과거 시험에 합격한 이들도 들어갔지요.
갑오개혁(1894) 이후 과거제도는 폐지됐고,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이화학당 등 사립 교육기관과 공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설립됐어요. 사립들은 임의로 학생을 선발했고, 육영공원은 고관들의 자녀를 입학시켰지요.
해방 후 대학 입시는 국가 주도 시험과 대학 자체 시험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됐어요. 각각의 단점이 드러나면 제도를 바꾸는 식이었지요. 우선, 해방 직후엔 대학별로 입학 시험을 실시했어요. 그런데 한국전쟁 후 대학생에겐 병역 징집을 유보해주는 혜택을 주자 대학생이 크게 늘었고 부정 입학도 문제가 됐죠. 그러자 정부는 1954년 국가가 주도하는 연합고사를 실시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입은 대학 자율로 하라고 지시해 시험 결과는 입시에 반영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군사 정부가 국가 주도 시험과 대학 자체 시험 둘 다 입시에 반영하도록 했는데, 대학들의 반발로 오래가지 못했어요.
1969년엔 국가가 주도한 대학입학예비고사가 부활했어요. 하지만 사립대들이 자율성 침해라고 반발했고, 정부는 예비고사 성적으로 모집 인원의 1.5배수를 뽑은 후 최종 합격은 대학별 시험을 통해 결정하게 했어요.
이후 1980년 정부는 '과외 금지 조치'를 실시하면서 이듬해 대학별 시험을 폐지했고 대학입학예비고사 점수와 고교 내신 성적을 합산해 입학에 반영하도록 했어요. 1983년엔 예비고사의 이름이 학력고사로 바뀌었어요. 이에 이 시기 대입을 치른 세대를 '학력고사 세대'라고 부르지요.
1990년대 들어 객관식 단답형의 학력고사가 수험생의 사고력을 측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1994년 수능이 도입됐어요. 수능도 객관식이긴 하지만 교과서 내용을 통째로 암기해 답하기보다는 글을 분석하거나 추론하게 한 점이 학력고사와 달랐죠. 도입 첫해엔 여름(8월)과 겨울(11월) 두 차례 치러졌어요. 이후 수능은 어려운 '불[火]수능', 쉬운 '물[水]수능'이 반복되며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여전히 입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2010년대 들어선 잠재력 있는 학생을 뽑겠다는 학종(학생부종합) 전형이 확대되면서 대입에 수능과 고교 성적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도 중요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