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디자인·건축 이야기] 냉전·분단 상징한 155㎞ 콘크리트벽… 장벽 잔해 서울·대전·제주 등에 있죠

입력 : 2021.11.16 03:30

베를린 장벽

 /위키피디아
/위키피디아
지난 9일은 베를린 장벽<사진>이 무너진 지 32주년 되는 날이었어요.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어떻게 세워졌을까요?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패전국 독일은 연합국이 통치하게 됩니다. 서쪽은 자유 진영인 미국·영국·프랑스가, 동쪽은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위임 통치를 하게 되죠. 1949년 서부 독일은 서독으로, 동부 독일은 동독으로 독립했어요. 하지만 지리상으로 동독인 베를린이 옛 독일 수도라는 상징성 때문에 서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 동베를린은 소련 관할 지역으로 남게 됩니다.

이후 1961년까지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250만명이 빠져나갔어요. 대부분 젊은이와 기술자였죠. 인재 유출을 걱정한 동독은 서베를린과의 경계선에 장벽을 세우는 계획을 세웠어요. 1961년 8월 공사를 시작해 서베를린을 둘러싸는 155㎞에 이르는 장벽이 완성됐어요.

장벽을 세우고 나서도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는 주민이 계속 나오자 장벽은 계속 보강됐어요. 1980년대 최종적으로 개량된 베를린 장벽은 높이 3.6m의 콘크리트 장벽이 106㎞ 뻗어 있고, 나머지 49㎞엔 3중 철조망이 세워졌어요. 장벽 밖에는 폭 60~70m 지역의 무인 지대를 만들어 감시탑 302개, 감시 벙커 20개 등을 설치하고 드나드는 사람을 철저히 감시했죠. 평당 20~50개씩 지뢰도 묻었어요.

이런 삼엄한 상황을 뚫고 동독 주민 약 5000명이 서베를린으로 들어갔답니다. 이 과정에서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방법들이 시도됐어요. 군복을 입고 신분을 속이거나, 한밤중에 고층 건물에 밧줄을 매고 서베를린까지 무거운 추를 던진 다음 줄을 타고 내려가기도 했어요. 땅굴을 파고 서베를린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죠. 이런 시도 중 200명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철벽 같던 장벽은 다소 허무하게 무너졌어요. 1989년 동독 시민들이 언론과 여행 자유화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이들을 달래려 11월 9일 오후 7시 기자회견을 열고 여권 발급 기간 단축 등 실효성 없는 정책을 발표했어요. 하지만 휴가 갔다 회견장으로 곧장 오느라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신임 정치국 대변인이 "언제 동독인이 서유럽으로 여행할 수 있느냐"는 돌발 질문에 "지금 당장"이라고 실언한 것이죠. 뉴스를 본 동·서독인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어요. 많은 사람이 도끼와 망치를 들고, 불도저와 크레인을 끌고 나왔고 장벽은 순식간에 무너졌지요. 베를린 장벽의 잔해는 현재 베를린에 있는 일부를 빼고는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 곳곳에 설치돼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서울(청계천), 대전(엑스포기념관), 제주(4·3 평화공원) 등에 있어요.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