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포장지에 그려진 日 목판화, 고흐·모네 매료시켰죠

입력 : 2021.11.03 03:30

자포니즘(Japonism)

일본 화가 안도 히로시게의 목판화‘아타케 대교의 소나기’(왼쪽)와 이를 따라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유화‘비 오는 다리’(1887). /반고흐미술관
일본 화가 안도 히로시게의 목판화‘아타케 대교의 소나기’(왼쪽)와 이를 따라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유화‘비 오는 다리’(1887). /반고흐미술관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수채화 작품 '건초 더미(Wheat Stacks)'가 오는 11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고흐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말년에 프랑스 남부 아를에 가서 이 작품을 완성했어요. '건초 더미'는 들판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묘사한 후기 인상주의 대표적인 작품이지요. '건초 더미'는 최대 3000만 달러(약 353억원)에 판매될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경매 업체 측이 내놓은 작품 설명 중 눈길을 끄는 것이 있어요. 바로 '당시 반 고흐가 빠져 있던 자포니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내용입니다. '자포니즘(Japonism)'은 서양 문화 여러 분야에서 나타난 일본 문화의 영향을 뜻해요. 고흐는 일본식 채색 목판화 '우키요에'를 수백 점 수집했고 일본 판화를 그대로 따라 그릴 정도로 일본 문화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아를에서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이 일본만큼이나 아름답다"고 말할 정도였죠.

고흐뿐 아니라 19세기 많은 유럽 예술가들이 일본 문화에 푹 빠져 있었어요. 서양 예술가들은 어떤 경로로 먼 동양의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왜 그토록 매료된 걸까요?

서구의 개항 압력

16세기 중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유럽인들은 앞다퉈 아시아로 진출했어요. 그들의 눈에 비친 아시아는 신비롭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천지였죠. 특히 당시 중국의 도자기는 귀중품 대접을 받았어요.

19세기 들어 중국의 청 왕조가 정치 부패로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어요. 서구 열강의 문호 개방 압력도 거세졌습니다. 당시 영국은 청에 통상을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영국은 차(茶) 등 중국 물품을 일방적으로 사야 했기 때문에 손해가 컸죠. 이에 무역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합니다. 중국에서 아편 중독자가 크게 늘어나 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아편을 두고 양국은 전쟁을 벌여요. 이 '아편 전쟁'에서 중국은 패배했고, 결국 난징 조약을 맺고 강제로 개항해야 했어요.

당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을 받던 일본은 결국 1854년 미국의 매슈 페리(1794~1858) 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됐어요. 하지만 이후 일본은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와도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적극적으로 개방했죠. 그 결과 유럽에도 일본 문화가 빠르게 전해졌어요. 같은 아시아 국가지만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일본의 문화는 유럽인을 단번에 사로잡았어요.

유럽에 일본 알린 프랑스 만국 박람회

일본에 대한 유럽의 관심이 커진 결정적 계기는 186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였어요. 일본은 이 해에 처음 박람회에 참가해 일본관을 열었어요.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친동생 도쿠가와 아키타케가 일본 대표 자격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직접 파리를 방문했죠. 7개월간 진행된 박람회에서 일본은 다양한 미술 작품과 공예품들을 전시했어요. 일본 차와 과자, 부채, 종이, 병풍, 도자기 등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답니다.

18세기 유럽에 전해진 중국 도자기나 가구 등은 일부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고급·사치품이었지만, 일본은 도자기를 비롯해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공예품을 주로 수출했어요. 그래서 유럽에서 일본 문화가 더 쉽고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던 거죠. 당시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 불던 일본 열풍은 대단했대요. 여성들은 기모노를 입고 거리를 다니고, 일본 병풍과 부채로 집을 꾸미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빛의 화가들 사로잡은 '우키요에'

당시 '빛의 화가'라고 불린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도 일본 문화를 접했어요. 그들이 가장 좋아했던 건 '우키요에'라는 일본 목판화였어요.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 시대(1603~1867년 봉건시대)의 목판화로, 초창기엔 책에 삽화로 사용됐지만 점차 독립적인 감상용 판화로 대량생산됐어요. 주로 기녀(妓女)를 모델로 한 미인화나 가부키(일본 전통 연극) 배우, 풍속화 등을 소재로 했어요.

당시 일본은 유럽에 수출하는 도자기를 유키요에가 프린트 된 포장지로 쌌는데, 화가들은 이 포장지를 통해 우키요에를 접했대요. 그들은 우키요에의 과감하고 현란한 색채와 평면적인 구도, 단순한 외곽선 등 자신들과 다른 화풍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인상주의 화가들은 우키요에를 자기 그림에 응용하거나, 아예 따라 그리기도 했어요. 프랑스 인상주의를 이끈 클로드 모네(1840~1926) 역시 일본 문화에 빠져 집 벽을 일본 판화로 장식하고 일본 전통 의상이나 부채 등을 많이 그렸어요. 아내 카미유가 붉은색의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부채를 든 모습을 그린 '일본 여인(La Japonaise)'이란 작품은 그의 일본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죠. 모네는 말년에 파리 근교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정착해 정원을 가꾸고 연못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일본식 다리를 설치할 정도였어요. 이 다리는 모네의 여러 작품에 등장합니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형성된 자포니즘은 이후 동유럽, 미국 등으로 전파됐어요.


['은하철도 999' 메텔, 실제 모델은?]

유럽에 일본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 중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1796~1866)라는 독일 의사가 있어요. 17세기 일본 에도 막부는 서양과의 무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나가사키 앞에 인공 섬 '데지마'를 세웠어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도 데지마에 무역상사를 두고 활동했죠. 네덜란드의 군의관이었던 지볼트는 1823년 데지마에 와서 일본 최초로 서양 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 일본 고유 식물을 연구해 기록으로 남겼어요. 그가 일본에 대해 쓴 책과 수집품 등은 유럽에 일본을 널리 알렸지요. 그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낳은 딸 구스모토 이네는 일본 최초의 여성 산부인과 의사였고, 손녀 구스모토 다카코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끈 일본 만화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메텔'의 실제 모델이기도 합니다. 만화 원작자 마쓰모토 레이지는 먼 친척인 다카코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메텔을 그렸다고 합니다.

클로드 모네가 기모노를 입은 아내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일본 여인(1876)’ /보스턴미술관
클로드 모네가 기모노를 입은 아내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일본 여인(1876)’ /보스턴미술관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