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저승 門 열려 해골들이 이승에 와 즐기는 날이래요
입력 : 2021.11.01 03:30
멕시코 '죽은 자의 날' 축제
- ▲ ①디에고 리베라‘죽은 자의 날’(1924). ②호세 과달루페 포사다‘자전거를 타는 뼈다귀로 묘사된 신문사 사람들’(1890년쯤). ③디에고 리베라‘어느 일요일 오후 알라메다 공원에서의 꿈’부분(1947). ④프리다 칼로‘나의 유모와 나’(1937) ⑤멕시코의‘죽은 자의 날’행사 모습. /이주은 교수 제공·멕시코 관광청
이날은 멕시코 사람들에겐 아주 특별한 날이에요. 그들의 조상인 고대 아즈텍 인디오의 전통 의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여기는 의미에서 지내는 제사예요. 16세기 멕시코가 스페인에 정복당하면서 추후 핼러윈으로 정착된 서양의 가톨릭 행사인 '모든 성인의 축일(All Hallow's Day)'과 결합하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날 멕시코 사람들은 제단 위에 옷과 음식, 설탕으로 만든 해골과 꽃 등을 놓아요. 거리엔 '마리골드'라는 주황색 꽃잎을 뿌려 죽은 영혼이 꽃잎을 밟으며 길을 잃지 않고 올 수 있도록 하지요. 애니메이션 '코코(Coco)'를 보면 주인공인 미구엘이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바로 '죽은 자의 날'에 다시 만납니다. 그럼 멕시코 대표 화가들이 그린 '죽은 자의 날'과 관련된 작품들을 감상해볼까요.
흥겨운 춤·노래 가득한 '죽은 자의 날'
'작품①'은 멕시코 국민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1886~1957)가 그린 벽화 '죽은 자의 날'입니다. 1920~30년대 멕시코에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벽화 운동이 확산하고 있었어요. 당시 멕시코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리베라는 멕시코 문화의 뿌리를 유럽이 아닌 토착 원주민 인디오의 풍속에서 찾으려고 했지요. 그는 멕시코인 모두가 인디오의 전통을 물려받은 창조적인 후예라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공공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죽은 자의 날' 그림을 보면 해골 인형 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기타를 치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그 아래 거리의 군중도 다 같이 먹고 마시고 춤추며 신나게 놀고 있네요.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조상을 기리는 동양의 제사와는 다른 풍경이지요? 멕시코 사람들은 이날 밤 저승 문이 열려 이승과 연결되면서 산 자와 죽은 자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묘지에 양초를 밝히고 음악도 틀어놓아서 영혼들도 흥겹게 즐기다 갈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산 사람들은 해골 분장을 하고 밤새 거리를 돌아다니고요.
이렇듯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멕시코 토착 신들의 특성에 이미 나타나요. 그들의 토착 신화에서 신들은 선과 악, 어둠과 밝음, 태양과 달 등 서로 대립하는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어요. 이를테면 대지의 여신 '코아틀리쿠에'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지배하는 신이지요.
해골 통해 유럽 추종하는 세태 풍자
리베라에게 큰 영향을 준 미술가는 멕시코 민중예술을 부흥시킨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J. G. Posada·1852~1913)입니다. 포사다는 '해골 미술가'로 불려요. 그림에 '죽은 자의 날'에 볼 수 있는 해골과 뼈로 된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상류층이나 정치를 풍자한 그림을 많이 그렸대요. '작품②'는 포사다가 제작한 판화로, 해골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어요. 이 해골들은 여러 신문사를 상징한대요. 19세기 말 멕시코는 포르피리오 디아스(1830~1915) 대통령의 독재 정치가 붕괴하던 시점이었는데, 당시 여러 계층의 지지를 받던 다양한 신문이 언론의 역할을 요구받던 시기였죠. 이런 상황을 신문사들이 자전거 경주를 벌이는 것처럼 풍자한 거예요.
포사다가 자주 그린 여자 캐릭터가 있는데 이름이 '카트리나(La Catrina)'예요. 꽃과 커다란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모자를 쓴 해골 여성이지요. 멕시코 전통보다 유럽 문화를 따라하던 멕시코 상류층을 풍자한 것이라고 해요. 이 이미지는 이후 '죽은 자의 날' 축제를 대표하게 됐답니다.
카트리나는 리베라의 작품에도 등장해요. 리베라가 그린 벽화 '어느 일요일 오후 알라메다 공원에서의 꿈'(작품③)을 보세요. 해골 얼굴에 화려한 모자를 쓴 카트리나가 보입니다. 그녀 손을 잡은 키 작은 통통한 소년이 바로 리베라 자신이지요. 리베라 뒤쪽에 서 있는 여인은 멕시코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이자 리베라의 아내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입니다.
[가장 멕시코다운 화가 리베라·칼로 부부]
칼로는 리베라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와 예술적 신념을 같이하게 됐어요. 그녀는 리베라와 결혼할 때도 서양식 하얀 웨딩드레스 대신 멕시코 인디오의 민속 예복을 입을 정도로 인디오 문화에 애착이 깊었어요. 평소에도 민속 의상을 즐겨 입었고요. 리베라와 칼로는 나이 차이가 스물한 살이나 나고 '코끼리와 비둘기'라 불릴 정도로 덩치도 달랐지만, 평생을 함께한 예술적 동지였습니다.
리베라와 칼로가 활약하던 20세기 초 미국 등 주변 국가들은 공장과 자동차가 넘치는 현대적 도시로 변하고 있었지만 멕시코는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정치적으로도 극도로 불안정했어요. '작품④'는 이 시기 칼로가 그린 것인데, 자신을 대지의 어머니로부터 젖을 빨아 먹는 건강한 아이로 그렸어요. 국가가 처한 상황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지요. 그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그가 비슷한 시기에 한 말을 들어보면 짐작할 수 있어요. "멕시코는 늘 그렇듯 혼란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건 인디오 땅의 거대한 힘과 아름다움이지요." 당장은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어도 멕시코 국민들이 오래도록 간직해온 전통과 저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표현한 게 아닐까요?
리베라와 칼로는 옛 멕시코 문명의 창조성을 현대로 되살려낸 가장 멕시코다운 미술가 부부로 알려져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