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궁궐 장식부터 의궤까지… 김홍도·신윤복도 '공무원 화가'

입력 : 2021.10.21 03:30

화원(畫員)

/그래픽=안병현
/그래픽=안병현

오는 26일 조선시대 뛰어난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와 이인문의 그림이 동시에 경매에 출품된다고 해요. 김홍도가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와 이인문의 '송석원시회도'라는 작품이에요. 두 작품 모두 1791년 송석원시사의 멤버들이 모임하는 장면을 그린 거예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는 1786년 중인(中人) 출신 문인들이 서울 종로구 일대 송석원에서 결성한 문학 동인이었어요. 김홍도와 이인문은 동갑내기 화가였을 뿐 아니라, 둘 다 도화서(圖畫署)에 소속된 화원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조선시대 직업 화가인 화원(畫員)들은 어떻게 뽑혔고, 무슨 일을 했을까요?

조선 회화의 산실, 도화서

'화원'은 조선시대에 그림을 그리는 일에 종사하던 직업 화가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화원들은 '도화서'라는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국가나 왕실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던 관료들이었어요. 일종의 공무원 화가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에게 친숙한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도 모두 도화서 화원 출신이에요. 나라에서 전문 화가들을 모아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신라의 '채전(彩典)'이나 고려의 '도화원(圖畫署)'에서도 확인되는 등 그 뿌리가 아주 깊답니다.

조선시대 화원은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어요. 중인들은 양반을 도와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 의학이나 법률, 천문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 외국과 교류할 때 외국 사람 통역을 맡은 역관 등이 있었는데 화원도 그중 하나였지요. 오늘날 의사나 판검사·통역관 등은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술을 천시했기 때문에 승진에 제한을 두는 등 많은 차별을 받았답니다.

화원이 되는 방법 '취재 시험'

도화서 화원은 조선 전기에 정원이 20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중 5명만 봉급을 받는 정규직이었어요. 나머지는 일이 많을 때 불려와 봉사하는 비정규직이었고요. 하지만 그림 그릴 일이 매우 많아서 늘 일손이 부족했답니다. 비록 벼슬은 낮았지만 그림 그리는 재주로 관직에 오르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대요.

도화서 화원이 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 전문 교육을 받아야 했어요. 그리고 반드시 '취재(取才)'라는 선발 시험을 통과해야 했지요. 당시 시험 과목은 대나무, 산수(풍경), 인물, 영모(새와 동물), 화초 등 다섯 과목이었어요. 응시자는 이 중 두 가지를 선택해 그렸는데, 평가자는 '통(通), 약(略), 불통(不通)' 세 단계로 평점을 매겼어요. 특이한 점은 과목마다 평점에 차등을 둔 거예요. 같은 '통'이라도 대나무는 5점, 산수는 4점이지만, 인물이나 영모는 3점밖에 되지 않았어요. 대나무와 산수를 잘 그리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험이었죠. 이런 방식을 시행한 것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대나무를 사군자의 으뜸으로 여기고, 또 산수와 같은 풍경을 그린 위에 시와 글쓰기를 즐겼기 때문이에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직업 화가들

화원은 단순히 그림 그리는 일뿐 아니라 지금으로 치면 디자인이나 사진작가 일도 도맡아 했어요. 궁전 각 처소에 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병풍이나 외국 사신 접대에 필요한 궁중 장식화, 왕실 잔치나 장례와 같은 행사 장면을 그리는 일뿐 아니라, 해마다 임금에게 바치는 세화(歲畫)와 문배(門排)를 그리는 일도 했어요. '세화'는 새해를 축하하는 그림으로 조선시대 선비들끼리 주고받았는데, 임금도 신하들에게 내려줬대요. '문배'는 설날 새벽에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대문에 붙이는 액막이 그림을 말해요. 도화서 화원들은 매년 12월 20일까지 세화를 그려서 바쳐야 했는데, 모두 합쳐 1380장이나 그려야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복사기도 없던 시대였으니, 연말에 저렇게 많은 세화를 그려내려면 야근의 연속인 고단한 삶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도화서 화원들이 가장 많이 그려야 했던 것은 국가적 의례나 제사 등을 기록한 의궤(儀軌) 그림이었어요. 프랑스 해군에 약탈당했다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속 그림도 당연히 화원 손에서 나온 것이에요.

출세의 지름길, 어진 그린 화가

조선시대 그림 중에서 가장 정밀하고 정성 들여 제작한 그림이 임금 초상화인 '어진(御眞)'이에요. 어진은 임금마다 최소한 한 폭 이상 제작했는데, 10년마다 모사(模寫·원본을 베껴 그림)했대요. 25년을 재위한 정조 임금은 세 차례나 어진을 그렸어요. 어진을 만드는 일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작업이었던 만큼 가장 뛰어난 화원들이 주로 선발돼 맡았어요. 어진은 3명이 함께 그렸는데, 2명이 얼굴과 몸을 나누어 그리고 한 명은 그들을 보좌했다고 해요. 어진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것부터가 화원으로서 최고 영광이었고, 잘 그리면 큰 상을 받기도 했고 출세도 보장됐죠. 단원 김홍도는 29세 때인 1773년에 영조와 왕세자 초상을 그릴 만큼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도화서의 여성 화원]

도화서는 남성 전유물이었을까요? 성현이라는 사람이 펴낸 '용재총화'라는 책에는 도화서에서 일한 화원 '홍천기'가 나와요. 요즘 TV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홍천기도 이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얻은 것이지요. 성현은 이 책에서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에 대해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고 극찬했지만, 홍천기에 대해서는 비록 산수화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재주는 낮다고 평했어요. 하지만 그녀의 외모에 대해선 "홍천기라는 여자는 용모가 매우 뛰어나다"며 칭찬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조선시대 도화서에 여성 화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여성 화원이 그린 작품은 현재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요. 이 때문에 드라마 속 홍천기처럼 그림 실력이 뛰어났을지는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미 능력을 발휘한 여성 직업 화가가 있었다는 점은 기억해둘 만하지요.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