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여름 안에 몰래 숨어… 가을은 악마" 유명 작가 39인이 쓴 '계절 이야기'

입력 : 2021.10.21 03:30
[재밌다, 이 책!] "여름 안에 몰래 숨어… 가을은 악마" 유명 작가 39인이 쓴 '계절 이야기'

작가의 계절

다자이 오사무 외 38인 지음 l 안은미 옮김 l 출판사 정은문고 l 가격 1만5000원

"가을은 여름과 동시에 찾아온다. 여름 안에 가을이 몰래 숨어 이미 찾아왔는데도 사람은 불볕더위에 속아 알아채지 못한다. 귀 기울여 들어보면 여름이 오자마자 벌레가 울고, 정원을 유심히 둘러보면 도라지꽃이 피어 있다. 잠자리도 원래는 여름 벌레이고 감도 여름 동안에 착실히 열매를 맺는다. 가을은 교활한 악마다. 여름 사이 모든 단장을 마치고 코웃음을 치며 웅크리고 있다."

20세기 일본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이에요. 비록 짧은 문장이지만, 그가 얼마나 관찰력과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인지 눈치챌 수 있지요.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인간 실격'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어두운 내면을 묘사하는 자전적 소설이에요. 그런 작가가 가을이라는 계절에 대해선 더없이 아름다운 감수성을 보여주니 참 흥미롭습니다.

최근 출간된 '작가의 계절'은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일본 대표 작가 39명이 계절에 관해 쓴 글을 모은 책이에요.

"바람 한 점 없다. 나뭇잎이 바스락바스락 소리조차 내지 않는 가운데 신발 밑으로 무너져가는 서릿발 소리만이 차디차게 울려 퍼진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걸린 새하얀 낮달 너머로 잿빛 구름을 한 겹 들추면 새하얀 가루눈이 가지런히 쌓여 있을까, 상상할 만한 정경이다."

미야모토 유리코라는 소설가가 남긴 겨울에 대한 문장이에요. 이 작가는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 피폐해진 일본 사회 모습을 여성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 '반슈평야'로 유명해요. 이 작가는 1940년대에 문학으로 민주주의 운동을 펼쳤고 그래서 수차례 투옥됐고 집필 금지 처분까지 받았다고 해요. 평생을 싸우기만 했을 것 같은 미야모토 유리코지만, 계절에 대한 문장만큼은 순수한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네요.

'작가의 계절'에 등장하는 문장은 모두 시적이고 아름다워요. 작가들이 남긴 작품과 그들의 인생을 함께 떠올리며 이 책을 읽으면, 아름다운 문장 속에 어떤 깊이가 숨어 있는지 눈치챌 수 있답니다. 어쩌면 책장을 넘기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몰라요. 사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물이 나곤 하니까요.

이 세상에 글이라는 흔적을 남긴 뛰어난 작가들. 그런 이들의 눈에 시간과 계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들은 과연 어떤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까요? 이 책은 '계절'이라는 가장 평범한 주제를 통해 작가의 마음속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김성신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