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 자주 찾으려 별장 크게 지었죠
화성행궁과 정조의 효심
- ▲ /그래픽=안병현
경기 수원시가 '화성행궁 2단계 복원공사'의 핵심인 우화관(于華館)과 별주(別廚)를 복원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우화관은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묵던 곳이고, 별주는 음식과 술을 만들고 제례 관련 문서를 보관하던 곳이었습니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재위 1776~1800)가 쌓은 수원화성에 있는 행궁이에요. '행궁'이란 임금이 서울 밖에 행차했을 때 머물던 일종의 별장이에요. 충남 아산에는 세조가 다니던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행궁이 있고,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란한 의주행궁, 인조 때 만든 남한산성행궁, 숙종 때 북한산성에 만든 양주행궁, 정조 때 세운 화성행궁 등이 있죠. 이 중에서도 경기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화성행궁은 21개 건물 576칸 규모로, 규모도 가장 크고 격식도 가장 돋보이는 행궁입니다. 그런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병원·경찰서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거나 허물어져 본래 모습을 잃었고, 1989년부터 꾸준히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조 임금은 수원에 왜 이렇게 큰 행궁을 지었을까요? 그것은 정조 임금이 별세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남다른 효심(孝心)으로 이곳을 자주 찾아 머물렀기 때문이에요.
뒤주에 갇혀 죽은 세자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글도 잘 읽고 말씀도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러지 마소서!"
1762년(영조 38년), 창경궁 문정전 앞에서 임금을 향해 울부짖는 사람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1735~1762)였습니다. 영조는 그런 아들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서슬 퍼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뒤주는 쌀 같은 곡식을 담아 두는 나무상자예요. 뒤주에 갇힌 세자는 8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조선 왕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임오화변'입니다.
조선 후기인 18세기의 두 임금, 21대 영조(재위 1724~1776)와 22대 정조의 치세는 '조선의 중흥기'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영조와 정조는 부자지간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였어요.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가 훗날 '장조'로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임금의 칭호를 줌)된 사도세자였습니다.
영조는 왜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걸까요? 영조는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어요. 그래서 아주 강도 높은 훈육을 했고, 그 결과 세자는 정신병에 걸려버렸습니다. 내관과 궁녀 등 숱한 주변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했지요. 영조의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아들 사도세자가 아니라 꾸준히 학업에 매진하고 영특했던 세손(훗날의 정조)이었어요. 아들에 대한 영조의 실망감은 결국 임오화변이란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11년간 13번 수원에 행차한 정조
1789년(정조 13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동대문구)에서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 화산 아래로 옮기고, 이름을 '현륭원'이라 했습니다. 이후 사도세자가 추존돼 '융릉'으로 격상됐죠.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 화성시입니다.
융릉은 보통 왕릉의 정자각(능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건물)이 무덤 바로 아래 있는 것과 달리 무덤에서 보기에 오른쪽으로 조금 비켜 지어졌는데, 이것은 정조가 "뒤주 속에서 돌아가셨는데 무덤에서도 앞이 막혀 있다면 얼마나 답답하시겠느냐"고 말해 일부러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이듬해 2월부터 승하한 해인 1800년 1월까지 모두 13차례 화성에 행차해 현륭원을 참배했습니다.
그중 1795년(정조 19년) 화성 행차는 가장 큰 규모였는데, 아버지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회갑을 맞는 해였기 때문입니다. 7박 8일 행차 동안 수행 인원은 6000명에 이르렀고 10만냥(현재 가치 약 70억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중 2만냥(약 14억원)은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 등을 나눠주는 데 썼대요.
정조는 행사 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한 고개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한참 동안 머물렀는데, 이후 그 고개에는 '더딜 지(遲)'자를 써서 지지대(遲遲臺) 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 자책했대요
정조가 이토록 극진한 효심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나 때문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죄책감과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해요. 세손이 그토록 영특하지 않았다면 할아버지가 아들 대신 손자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정조 평전'을 쓴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갖게 된)유소년기 정조의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받은 가르침 덕분에 임금이 된 뒤 좋은 정치에 애쓰는 긍정적인 원천이 됐다"고 평가합니다.
[정조의 화성 건설]
정조가 수원을 자주 찾은 것은 효심뿐 아니라 '수원화성 건설' 때문이기도 했어요. 화성은 1794년(정조 18년) 2월 공사를 시작해 2년 6개월 만에 완공됐는데, 당시 국내외 성곽 기술을 총동원해 만든 명품 성곽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 등 당대 첨단 장비도 동원됐다고 해요. 당시만 해도 인가가 드물던 수원이 신도시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일각에선 '정조가 화성으로 천도(수도를 옮김)하려 했던 게 아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양 도성의 길이가 18.6㎞였던 데 비해 화성의 당초 길이는 8.3㎞로 지나치게 작아 천도를 하려 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그보다 자신이 은퇴한 뒤에 살 '이상 도시'를 만들려 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세자(훗날 순조)가 15세가 되는 1804년에 물러나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에서 살겠다는 정조의 말이 실려 있어요. 하지만 정조가 1800년에 세상을 떠나 그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고, 왕릉(건릉)만은 아버지 무덤 근처에 자리 잡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