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제국의 심장' 향해 폭탄 투척… 일본이 감추려한 독립영웅

입력 : 2021.09.16 04:44

독립운동가 김지섭

/그래픽=안병현
/그래픽=안병현

최근 독립운동가 김지섭(1884~1928) 의사가 감옥에서 가족에게 쓴 편지 네 통이 문화재로 등록된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김 의사는 편지에서 투옥된 동지의 안부를 묻고, 아내에겐 면회를 오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김지섭 의사는 윤봉길 의사나 이봉창 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입니다. 수능 모의고사나 공무원 시험에 '의열단 독립투쟁'을 한 인물의 예시 등으로 가끔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수험생들이 "김지섭이 누구냐"며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니까요. 그는 일본 도쿄의 일왕이 사는 왕궁에 폭탄을 던졌던 독립운동가이지만, 일본 입장에선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사건 자체를 언급하지 않고 묻으려 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김지섭 의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해요.

의열단 무장투쟁에 뛰어들었어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김지섭은 어려서 한문을 공부하며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퇴계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해요. 1907년 상주보통학교 부교원으로 임용됐고, 이듬해 서울로 올라가 일본어를 익히고 1909년 8월 대한제국 재판소 번역관 시험에 합격해 전주구(區) 재판소 번역관보에 임명됐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합격한 걸 보면 대단히 총명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박탈한 기유각서가 발효돼 1909년 11월 법부가 폐지되고 일제 통감부 사법청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한제국 공무원'에서 '일본 공무원'으로 소속이 바뀐 그는 훗날 "일본에 모욕을 당할 때 분개해 독립운동을 결심했다"고 술회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뒤 본격적인 독립운동 투신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김지섭은 1922년 상하이에서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해 본격적인 무장투쟁 항일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관동대학살 소식 듣고 의거 결심했어요

의열단원 김지섭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등 국내 주요 일제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1923년 폭탄 36개를 조선으로 들여오려 했습니다. 군자금 모금도 함께 추진했죠. 그러나 일본 경찰이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돼 동지들이 체포됐고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1923년 9월 일본에서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동포 6600명 이상이 일본인에게 살해당하는 '관동대학살'이 벌어진 것이죠. 김지섭은 이 소식을 듣고 통탄하며 "동포들의 원혼을 달래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내년 초에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 의회'에 조선 총독도 참석한대!" 일본의 고관대작들은 물론 조선총독부의 주요 관리까지 이 의회에 모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의사당에 들어가 방청석에서 폭탄을 던지면 한 번에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의 많은 자들을 처단할 수 있겠군!"

일본어에 능통한 김지섭은 이 일의 적임자였지만, 폭탄을 지니고 정상적인 경로로 일본까지 가기는 어려운 일이었어요. 1923년 12월, 김지섭은 의열단에서 받은 폭탄 3개를 숨긴 채 상하이에서 석탄 운반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했습니다. 열흘간 배 밑 창고에서 지내면서 하루에 주먹밥 한두 개를 먹고 버텼다고 합니다.

제국의 심장 '일본 왕궁'에 폭탄 던졌어요

그러나 막상 일본에 도착하니 제국 의회가 미뤄졌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밀항 신분으로 오래 기다릴 수 없었던 김지섭은 '제국의 심장부'인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지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어요. 일왕을 직접 암살할 수는 없다고 해도,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는 상징적인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1924년 1월 5일 오후 7시, 김지섭은 일본 왕궁을 둘러싼 히비야 공원으로 향한 뒤 마침 지나가는 구경꾼 두 사람과 동행인 것처럼 걸어가다 왕궁 정문으로 다가갔습니다. 이때 그를 수상하게 여긴 히비야 경찰서 경찰관이 막아서며 검문을 하려고 하자, 김지섭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외치며 양복 주머니에서 폭탄 하나를 꺼내 안전핀을 뽑고 경찰관에게 던졌습니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나머지 폭탄 두 개를 꺼내 양손에 하나씩 든 김지섭은 왕궁 정문 앞 다리인 니주바시(二重橋)로 달려갔습니다. 왕궁을 지키던 위병 두 명이 총을 겨누면서 뛰쳐나오자, 김지섭은 남은 폭탄을 던졌으나 역시 폭발하지 않아 실패했습니다. 처음 폭탄은 배[船] 밑 습기에 도화선이 눅눅해져 작동하지 않았고, 나머지 두 폭탄은 미처 안전핀을 뽑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격투 끝에 체포됐습니다.

당시 이 사실은 일제의 보도 통제로 3개월 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후 조선일보는 1924년 4월 24일 호외를 발행해 김지섭의 의거를 상세히 알렸습니다. 이후 김지섭은 재판정에서 "3·1 운동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였으나 적에게 잡힌 나로서는 결코 항복하지 않겠다" "정의를 생각하거든 방면할 것이요, 그러지 않거든 사형밖에는 없다"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1925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27년 징역 20년으로 감형됐으나 1928년 2월 감옥에서 갑자기 순국(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했어요. 일제는 사인을 '뇌일혈'이라고 발표했어요.

김지섭 의사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 독립 정신을 널리 알리고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은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지섭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의열단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입니다. 독립운동 노선 중에서도 직접적 투쟁 방법인 암살이나 폭파 등을 통해 항일운동을 하는 단체였죠. 주요 활동으로는 김익상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1921),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1923), 김지섭 의사의 일본 도쿄 왕궁 폭탄 투척 의거(1924),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1926) 등이 꼽힙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