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클래식 따라잡기] "신이 내린 목소리" 극찬… 거액 음반 계약 시대 연 선구자

입력 : 2021.09.13 03:30

엔리코 카루소

엔리코 카루소가 오페라 ‘팔리아치’에서 광대 옷을 입은 모습. /위키피디아
엔리코 카루소가 오페라 ‘팔리아치’에서 광대 옷을 입은 모습. /위키피디아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최초로 소리를 녹음하는 '축음기'를 개발한 것은 1877년이었습니다. 그 후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해 이제 우리는 극장에 가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연주자가 바로 앞에 있는 듯 생생한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죠. 음악 녹음은 축음기 발명 수십 년 후 이뤄졌는데, 당시 음반을 녹음해 대중적으로 처음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1873~1921)였습니다. 올해로 타계 100주기를 맡는 카루소는 모두가 인정하는 역사상 최고의 테너예요. '오페라는 카루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지요. 카루소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푸치니도 열광한 카루소

카루소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요. 기계공이었던 아버지는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아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아들을 격려하고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라고 추천했어요. 그런 어머니는 카루소가 15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카루소는 그 후 술집이나 식당 등에서 노래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1894년 11월 나폴리 누오바 극장에서 첫 데뷔 무대를 가졌어요. 데뷔 후에도 여전히 무명이었던 그가 성장하게 된 건 지휘자 겸 성악 교사였던 빈센초 롬바르디를 만난 다음부터였죠. 롬바르디는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던 카루소에게 자기 목소리에 맞는 레퍼토리와 발성을 훈련시켰고, 그 결과는 놀라웠어요. 그는 1897년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지오콘다'에 출연해 성공한 후 1900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1902년 영국 런던 코번트 가든, 1903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 무대에 오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특히 1897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와의 만남은 카루소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오디션에서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포 역을 노래하는 카루소에게 감동한 푸치니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가 당신을 나에게 보냈나? 신이 보낸 것인가?" 그 후 카루소는 1906년 푸치니의 오페라 '마농 레스코' 의 뉴욕 초연과 1910년 '서부의 아가씨'의 세계 초연을 맡아 극찬을 받았습니다. 어느덧 카루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테너 가수가 됐고, 출연료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죠.

사실적 연기가 최대 매력

청중이 카루소에게 열광한 가장 큰 이유는 극 중에서 맡은 역할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 실감 나는 노래를 들려주는 능력 때문이었어요. 카루소 이전의 테너들은 부드러운 미성으로 달콤하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카루소는 극의 느낌에 맞게 때로는 강하고 우렁차게, 때로는 슬프게 절규하는 표현까지 자유자재로 노래했습니다. 그는 특히 '베리스모' 분야의 오페라를 즐겨 불렀어요. 베리스모 오페라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현실 사람들의 사실적인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를 말합니다. 주인공도 그에 맞는 사실적인 노래와 연기를 보여줘야 했죠. 카루소가 부르는 남자 주인공은 어떤 오페라에서든 풍부한 표현력과 뛰어난 연기로 객석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런 그의 스타일이 잘 나타난 대표적인 노래가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에 나오는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변심에 분노하면서도 어릿광대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슬픈 운명에 대해 탄식하는 노래죠.

20세기 첫 성공 한 음반 녹음

카루소가 우리의 기억에 영원히 남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가 남겨 놓은 여러 음반 덕분이에요. 그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에게 녹음이 낯설었던 20세기 초 자기 목소리를 음반으로 남긴 선구자 중 한 명이었죠. 그의 최초 녹음은 1902년 4월 1일 밀라노 그랜드 호텔의 한 객실에서 전설적인 프로듀서 프레드릭 가이스버그와 함께 이뤄졌어요. 그땐 마이크가 아닌 메가폰 앞에서 노래하는 방식으로 녹음했는데, 카루소는 10곡의 아리아를 불렀어요. 당시 그는 통상의 20배가 넘는 100파운드를 출연료로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음반을 발매한 그라모폰사(社)는 150배 넘는 수익을 올렸고, 그 후 카루소는 빅터사(社)와 전속 계약을 맺고 녹음을 계속해 200만 달러 가까운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과로로 40대에 세상을 떠났어요

카루소는 어떤 무대에서든 최선을 다했고, 신인 가수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을 던지며 즐거움을 주는 인물이기도 했죠. 1차 세계대전 중엔 자선음악회를 열어 관련 단체에 수익 전부를 기부했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오페라단 단원 모두에게 줄 선물을 직접 골랐다는 미담도 전해집니다.

안타깝게도 최고의 자리에서 쉼없이 활동하던 카루소는 몸을 지나치게 혹사한 탓에 젊은 나이에 건강을 잃게 됩니다. 1920년 12월 24일 메트로폴리탄 극장 공연을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난 카루소는 늑막염과 종양으로 위험한 상태였어요. 1921년 5월 고향 나폴리에서 요양하며 재기를 꿈꿨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그해 8월 4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과 사랑, 아름다움을 담은 카루소의 노래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귓가에 머물며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노래가 된 카루소의 인생]

카루소의 인생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노래가 됐어요.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노래를 부르며 작사·작곡도 하는 사람) 루치오 달라(1943~2012)가 1986년 발표한 '카루소'입니다. 이 노래는 달라가 카루소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소렌토의 한 호텔을 직접 방문하고 영감을 받아 즉흥적으로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탈리아의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가 불러 세계적 히트곡이 되기도 했어요. 이 노래 가사는 무대를 떠난 성악가가 사랑하는 소녀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내용입니다. 후렴구의 애절한 멜로디는 언제 들어도 뜨거운 열정이 느껴집니다. '그대를 무척 사랑하오/ 알고 있소?/ 지금 이 사랑의 굴레가 나의 피를 모두 녹여버린다오.'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을 위해 의상을 입은 카루소. /위키피디아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을 위해 의상을 입은 카루소. /위키피디아
카루소는 만화도 잘 그렸어요. 이 그림은 1902년 당시 최신식 기술을 이용해 노래를 녹음했던 자기 모습을 스스로 그린 거예요. /위키피디아
카루소는 만화도 잘 그렸어요. 이 그림은 1902년 당시 최신식 기술을 이용해 노래를 녹음했던 자기 모습을 스스로 그린 거예요. /위키피디아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