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장희빈과 로맨스'로 유명… 실제론 강력한 왕권 휘둘렀어요

입력 : 2021.09.09 03:30 | 수정 : 2021.09.10 10:47

조선 숙종의 진짜 모습

 /그래픽=안병현
/그래픽=안병현
국립고궁박물관이 '9월의 큐레이터 왕실 추천 유물'로 조선 19대 임금 숙종(재위 1674~1720)의 태항아리를 선정했어요. 조선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태(胎·태반이나 탯줄 등 태아를 둘러싼 조직)를 항아리에 보관했는데 이것을 태항아리라고 합니다. 새 생명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귀중한 공예품이라고 하는데요. 숙종은 우리가 TV에서 접한 모습과 다른 면모를 많이 지닌 인물이었어요. 그는 어떤 임금이었을까요?

나라를 재건한 군주로 평가받아요

숙종은 TV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임금입니다. 왕비였던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악녀'로 곧잘 등장하는 후궁 장희빈이 왕비가 됐다가, 다시 인현왕후가 왕비로 돌아온 뒤 병으로 죽고 장희빈은 사약을 받습니다. 숙종은 이 복잡한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이자 두 여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이거나, 천진난만하고 자상한 사람처럼 묘사되곤 했죠.

그런데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숙종은 이와는 사뭇 다른 군주로 보입니다. 정옥자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兩亂)으로 큰 상처를 입었던 조선 왕조는 17세기에 경제적 재건과 자부심 회복의 과정을 거쳤다. 견제와 균형, 상호 감시 체제가 확립됐고 국가 청사진이 제시됐다." 이것이 바로 숙종 때 일이었다는 겁니다. 그다음 숙종 재위 후반부에 해당하는 18세기 초부터는 조선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가 막을 열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강력한 왕권으로 '환국' 일으켰대요

이런 '국가 재건'에 군주인 숙종의 역할이 무척 컸어요. 이는 숙종이 조선 500년 역사에서도 드물게 강력한 왕권을 갖고 있어서 가능했어요.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숙종은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가 낳은 유일한 자식이었습니다. 왕이 되는 데 신하들의 도움을 받지도 않았고 임금 자리를 위협할 삼촌이나 사촌도 없었던 데다, 열네 살 때 왕이 됐는데도 어머니 명성왕후가 수렴청정(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이를 도와 정사를 돌보던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정통성'에서 남다른 위치에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지닌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방법이 바로 여러 차례의 환국(換局)이었습니다. 환국은 '시국 또는 판국이 바뀐다'는 뜻인데, 임금이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을 한 번에 뒤집어버리고 교체하는 '대규모 인사 조치' 또는 '숙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여러 당파 중에서도 남인 위주로 조정을 꾸려가던 숙종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을 중용했습니다. 1689년의 기사환국은 서인 배경의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남인 배경의 장희빈을 중전 자리에 앉히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숙종의 서인 공격은 집요했는데, 급기야 서인의 영수이자 거물 학자인 83세의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려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그 뒤 남인이 역공격을 당한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이 들어서고 인현왕후가 복위됐습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번갈아 왕비가 됐다가 쫓겨나는 과정이 그때그때 숙종의 면밀하고 냉혹한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으로 보는 쪽이 적절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자기 왕비조차도 정치에 이용한 셈이에요.

대동법 확대하고 상평통보도 만들었어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숙종의 실제 성격도 사극과는 많이 다릅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인현왕후에게 "주상(숙종)께서는 평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나는데 간악한 사람이 그걸 옆에서 부채질한다면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숙종이 분노했을 때는 꾸짖는 말을 그치지 못했고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불같은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숙종은 여러 훌륭한 업적도 남겼어요. 그는 공물을 쌀로 통일해 농민의 부담을 줄인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고, 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해 중앙과 지방 관청 등에서 쓰도록 했습니다. 상평통보는 속칭 '엽전'이라 불린 법적 화폐로, 쓰기 쉬워서 거래가 늘어났고 상업이 발달하는 계기가 됐어요.

일본을 상대로 국경회담 '울릉도 쟁계(爭界)'를 벌인 것도 숙종 때였어요. 당시 어부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 일본 어선을 발견하곤 일본에 가서 사과를 받고 돌아왔어요. 이를 계기로 조선 조정은 일본과 국경 회담을 벌여 1696년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다'라는 것을 공식 인정하게 했죠. 숙종은 또 1706년 충남 아산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세우게 하고, 이듬해 '현충사'라는 액자도 내렸어요.

[숙종의 아들 '경종'과 '영조']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는 1680년 스무 살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어 왕비가 된 인현왕후 민씨는 숱한 사극에 '착한 왕비'로 등장하죠. 아들을 못낳았는데, 이는 5년간 궁에서 쫓겨난 명분 중 하나가 되기도 했어요. 숙종의 뒤를 이은 20대 임금 경종(재위 1720~1724)은 장희빈(희빈 장씨)의 아들입니다.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1701년 사약을 마시고 죽었어요.

경종의 뒤를 이은 21대 임금이 이복동생인 영조(재위 1724~1776)였습니다. 조선 임금 최장인 52년간 왕위에 있었고, 탕평책을 써서 정국을 안정시켰으며 조선 후기 중흥을 이끈 왕이죠. 영조의 생모는 숙종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는 숙빈 최씨였습니다. 무수리 출신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가 '동이'예요.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