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사진보다 더 진짜 같은 그림… 완벽한 현실 반영 욕구 담아
입력 : 2021.08.30 03:30
포토리얼리즘
- ▲ 작품1 - 척 클로스 〈자화상〉(1968년). /워커아트센터·오드리 플랙 닷컴·클리블랜드미술관·이주은 교수 제공
미술가 중에서도 갑작스러운 척추 질환으로 팔다리가 마비됐지만, 결코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지난 19일 세상을 뜬 미국 화가 척 클로스(1940~2021)입니다. 클로스는 커다란 초상화로 유명한데, 그의 초상화를 보면 '이게 사진인가 그림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그의 그림처럼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사실 같은 그림을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 또는 '극사실주의' 그림이라고 불러요. 포토리얼리즘은 1960~1970년대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그 무렵 텔레비전의 보급 등으로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넘쳐났고, 포토리얼리즘은 그런 새로운 현실에 주목한 작가들이 시도한 것입니다.
모눈을 채워나가 완성한 거대 초상화
〈작품1〉은 1968년에 클로스가 그린 자화상이에요. 그는 자기 얼굴 사진을 찍은 다음 환등기로 비춰놓은 채 그 앞에 커다란 캔버스를 놓고 모눈종이처럼 구획했어요. 그리고 모눈을 한 칸 한 칸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붓이나 스프레이, 손으로 잉크를 찍는 등 다양한 방법을 써서 사진 같은 효과를 냈죠.
1988년 어느 날, 클로스는 성공한 예술가로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작품에 대해 연설하고 나오던 길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어요. 척추 장애로 목 아래가 마비된 거예요. 이후 그는 조수의 도움을 받아가며 몸을 기계 장치에 고정시켜 양 옆과 위아래로 조금씩 이동하면서 손과 붓 대신 에어브러시 등 도구를 활용해 물감을 미세하게 분사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다행히 새로운 그리기 방식이 그가 제작하는 정밀한 작품에 잘 어울렸지요.
신체 마비는 그가 인생에서 만난 여러 장애 중 하나일 뿐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그는 난독증과 사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면 인식 장애도 앓아 왔어요.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어찌 보면 나는 사람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 얼굴에 집착했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내 기억 속에 새겨두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어요. 그는 노년에는 치매까지 앓았죠. 평생 장애와 질병으로 고통받던 클로스의 삶은 그렇게 끝났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은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진짜 같은 정물화
오드리 플랙(1931~)도 척 클로스와 더불어 미국에서 활동한 포토리얼리즘 화가예요. 〈작품2〉는 그녀가 그린 '매릴린'(바니타스)입니다. 포토리얼리즘 작가들은 대부분 하나의 주제만 다루었어요. 클로스가 초상화에 집중했다면, 플랙은 정물화를 즐겨 그렸어요.
정물화 속에 타들어 가는 초, 목걸이용 시계, 모래시계 등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물건들이 놓여 있어요. 그런 물건들과 함께 꽃과 과일, 향수, 화장품, 손거울, 그리고 서른여섯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배우 매릴린 먼로(1926~1962)의 사진이 함께 놓여 있어요. 마치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영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전통적으로 이렇게 '삶의 덧없음'이란 주제를 드러내는 그림을 바니타스(Vanitas)화(畵)라고 해요.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텅 빈' '덧없는'이란 뜻이에요. 바니타스화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자주 볼 수 있죠. 플랙은 전통적 바니타스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바꿨어요. 그리고 여성의 아름다움이 화장품이나 향수로 대변되는 외적인 부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그렸다고 합니다.
헷갈리는 실제와 사진
〈작품3〉은 돈 에디(1944~)가 그린 'H를 위한 새 구두'예요. 여러 영상이 중첩된 듯 복잡한 그림입니다. 진열장에는 색색의 구두가 둥둥 떠 있듯 놓여 있고, 그림 왼쪽에는 한 남자가 서 있는데 몸이 반쪽만 선명하게 보여요. 거리에 지나가는 버스 모습도 잘린 듯 두 부분으로 나뉘어 보이고요. 커다란 건물이 장벽처럼 서 있는데, 앞부분엔 또 다른 건물의 일부분과 간판이 보여요. 에디는 상점의 진열장을 보다가 유리에 여러 모습이 중첩되어 반사돼 보이는 걸 발견했어요. 이걸 <사진4〉처럼 찍어보니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유리에 반사된 이미지인지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사진을 보며 그 상황을 그림으로 그렸죠. 포토리얼리즘 작품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실물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일부러 사진을 보고 그리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로 인화된 사진처럼 보이도록 그림 표면에 광택 처리를 하기도 해요.
물론 카메라가 없던 시절에도 서양에선 사람들이 깜빡 속을 만큼 실물과 똑같이 그린 그림이 많았어요. 하지만 포토리얼리즘 작가들이 그림을 통해 제시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진짜 같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실제 눈으로 사물이나 풍경을 보는 것보다 사진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세상을 접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걸 그림을 통해 말해줘요. 에디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973년이에요. 소셜미디어 등 더욱 다양한 매체가 등장한 지금은 어떤가요. 어떤 게 소셜미디어나 텔레비전에서 본 것인지, 어떤 것을 내가 실제로 봤는지 헛갈릴 때가 있진 않나요?
- ▲ 작품2 - 오드리 플랙 〈매릴린 (바니타스)〉(1977년). /워커아트센터·오드리 플랙 닷컴·클리블랜드미술관·이주은 교수 제공
- ▲ 작품3 - 돈 에디 〈H를 위한 새 구두〉(1973~1974년). /워커아트센터·오드리 플랙 닷컴·클리블랜드미술관·이주은 교수 제공
- ▲ 작품4 - 돈 에디 〈H를 위한 새 구두〉를 위해 찍은 사진. /워커아트센터·오드리 플랙 닷컴·클리블랜드미술관·이주은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