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디자인·건축 이야기] 환각 증상으로 집 안 가득 보였던 '물방울'… 세계적 예술 작품됐어요

입력 : 2021.08.24 03:30

구사마 야요이와 '호박'

구사마 야요이가 작품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어요. 작은 사진은 최근 태풍으로 떠내려간 그녀의 대표작‘호박’이에요. /OTA FINE ARTS·트위터 캡처
구사마 야요이가 작품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어요. 작은 사진은 최근 태풍으로 떠내려간 그녀의 대표작‘호박’이에요. /OTA FINE ARTS·트위터 캡처
지난 9일 태풍 9호 '루핏'이 일본을 지나가면서 큰 피해를 줬어요. 이때 '현대 미술의 섬'으로 불리는 나오시마섬의 명물 '노란 호박' 조형물이 바다에 떠내려가 파손됐어요. 검은 땡땡이 무늬가 촘촘히 들어간 높이 2.4m, 폭 2.5m의 노란색 호박 조형물은 세계적인 현대 미술가 구사마 야요이(92)의 대표작 '호박'(1994년 설치)이랍니다.

구사마는 작품에 땡땡이를 반복적으로 그려 넣어 '땡땡이 예술가'로 알려져 있어요. 땡땡이는 일본어로 점을 뜻하는 '덴텐(点点)'에서 유래했어요. 우리나라에선 '물방울 무늬'라고 하고, 영어로는 '도트(dot·점)'라고 부릅니다. 구사마는 외국에선 '폴카 도트 공주(Polka dot Princess)'라고 불려요. '폴카 도트'는 지름 1㎝ 정도 작은 원이 반복되는 패턴이에요. 서양에선 이 무늬가 중세 흑사병의 발진 자국을 연상시켜 기피되다 19세기 동유럽 집시들의 폴카 댄스 의상에 쓰인 게 유명해지면서 친숙한 패턴이 됐습니다.

구사마는 왜 '땡땡이'를 작품에 쓰게 됐을까요? 구사마는 10살 무렵부터 불안과 강박·환각 증세를 겪었어요. 눈을 뜨면 집 안 가득 땡땡이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고 해요. 이런 장면을 스케치북에 옮기면서 마음을 다스렸어요. 그는 미술 하는 것을 반대하던 부모님과 갈등을 빚다 1957년 미국 뉴욕으로 떠났어요. 당시 뉴욕은 팝아트, 미니멀리즘, 퍼포먼스, 설치 미술 등 실험적인 미술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어요. 구사마는 그곳에서 반복적인 점과 그물 무늬로 뒤덮은 그림과 설치 작품으로 주목받았어요. 방과 가구에 점을 그려 넣고 자기 몸에도 점을 그려 그곳에 들어가 행위 예술을 펼치기도 했지요.

구사마는 1973년 병세가 심해지자 도쿄로 다시 돌아가 스스로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리고 병원 근처에 작업실을 마련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며 정신 분열을 예술로 승화하고 치유하는 삶을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답니다. 이렇듯 구사마의 '땡땡이'에는 개인적 아픔과 예술혼이 함께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구사마는 이 시대 가장 주목받는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이기도 해요. 2019년 그녀의 작품이 796만달러(약 93억4700만원)에 팔렸는데, 살아 있는 여성 예술가 작품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이었어요.

전종현 디자인 건축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