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풍랑 만나 도착한 필리핀… 10개월 만에 언어 습득했죠

입력 : 2021.07.22 03:30

조선의 국제 여행자 문순득

/그래픽=안병현
/그래픽=안병현

'2021 신안국제문페스타'가 오는 10월 23~24일 전남 신안군에서 열린다고 해요. 조선 시대 국제 여행자라는 홍어 장수 문순득(1777~1847)을 주제로 한 축제예요. 당시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을 여행한 사람은 숱하게 많았지만, 스페인 식민지로 유럽 문화권이던 필리핀까지 다녀온 사람은 문순득이 처음이었어요.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노예로 팔려 유럽 땅을 밟았던 안토니오라는 조선인이 있었지만 그는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으니 여행자라기보다는 이주자라고 봐야 하죠. 도대체 문순득이란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풍랑을 두 번 만나 오키나와에서 루손까지

"저게 뭐야, 섬 아닌가!"

1802년(순조 2년) 1월 29일, 조선 고기잡이 배 한 척이 유구국(류큐·지금의 오키나와)에 도착했어요. 11일 전인 1월 18일, 26세 청년으로 이 배 선주였던 우이도 어물장수 문순득은 일행 5명과 함께 흑산도 근처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했습니다. 먼 남쪽으로 떠밀려갔던 이들은 간신히 류큐 뭍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죠.

그곳 사람들은 쌀과 채소, 돼지고기를 내 주며 문순득 일행을 친절하게 보살펴 줬어요. 그는 배가 부서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8개월 동안 류큐에 머물렀어요. 거기서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한다"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서 손바닥에 놓고 입으로 먹는다" "천한 사람은 어깨에 반드시 문신을 한다"는 등 그곳 풍습을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1802년 10월 7일, 문순득 일행은 류큐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조공선을 탔어요. 이제 중국을 거쳐 다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뿔싸, 이 배가 또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11월 1일 이들은 훨씬 남쪽의 한 섬에 닿았어요. "여기는 또 어딥니까?" "여송(呂宋)이라는데!" 그곳은 16세기에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필리핀의 루손섬이었습니다. '여송'은 '루손섬'의 한자 이름인데, 당시 필리핀을 뜻하기도 했어요.

미지의 땅 필리핀에서 버틴 10개월

당시 필리핀은 조선 사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땅이었어요. 유구국과는 달리 현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같은 배에 탔던 중국인들과 함께 화교 마을에 머물렀어요. 문순득은 현지 언어를 익히고 끈을 꼬아 팔며 중국 상인들의 쌀 거래를 도우며 생계를 꾸렸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그의 관찰력은 빛났어요. 비간(Vigan)의 세인트폴 대성당을 보고 "30~40칸의 긴 집으로 비할 곳 없이 크고 아름다웠으며, 탑 꼭대기에 금으로 만든 닭을 세워 머리가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돌게 했다"고 묘사합니다. 현지의 풍습에 대해선 "남자가 밥을 지으며 남녀가 둘러앉아 손으로 먹는데 귀인(貴人·사회적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은 일간삼지(一幹三枝·줄기 하나에 가지가 세 개라는 뜻으로 '포크'를 의미)로 꿰서 먹는다" "춤은 남녀가 마주 서서 손을 늘어뜨리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고 했어요.

그렇게 10개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날이 다가왔습니다. 1803년 8월 28일 중국 상선을 얻어 탄 문순득은 마카오와 난징·베이징·의주·한양을 거쳐 1805년 1월 8일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3년 만의 귀향이었습니다.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대요

문순득은 글을 거의 몰랐기 때문에 그의 각별한 여행이 기록으로 남겨지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마침 흑산도에는 실학자 정약전이 유배를 와 있었고, 거기에 장사하러 온 문순득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표해시말'(표해록)이라는 기록을 남겼어요. 정약전이 대필한 문순득의 여행기에는 다른 어느 서적에도 없는 류큐와 필리핀의 전통문화가 생생히 기록돼 있을 뿐 아니라, 112개 한국어 단어를 81개의 류큐어와 54개의 필리핀어로 적은 것도 첨부되어 있어 언어학적 가치가 높습니다.

전남 강진에 유배 와 있던 정약전의 동생인 다산 정약용은 '여송에서 화폐가 유용하게 쓰인다'는 문순득의 말을 전해 듣고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펼치게 됐다고 합니다. 정약용이 보내 문순득을 만난 제자 이강회는 그 뒤 선박 개혁을 주장하는 '운곡선설'을 쓰게 됩니다. 한 홍어 장수의 여행기가 조선 후기 많은 실학자에게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했던 것이죠.

1809년, 문순득은 제주도에서 9년째 머무르던 신원 불명의 외국인 3명을 만나게 됩니다. 필리핀 말로 얘기를 나눠 보니 과연 필리핀 사람들이었고, 나라에서는 이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단 10개월 동안 필리핀에 있었으면서 통역할 수 있는 외국어 능력을 갖추게 됐다니, 문순득은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약전과 '자산어보']

홍어 상인 문순득의 여행기 '표해시말'을 기록한 정약전(1758~1816)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저서 '자산어보'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이기도 하죠. 성호 이익의 학맥을 이은 학자로, 1790년 증광별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1797년 병조좌랑을 지냈으나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붙잡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가 유배지에서 집필한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에 자생하는 수산생물 200여 종을 관찰하고 조사해 생태와 습성·요리법까지 상세히 기록한 저서로, 실학의 대표적인 명저 중 하나로 꼽힙니다. 정약전은 유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흑산도에서 별세했는데, 그의 장례를 치러 준 사람이 바로 문순득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강진의 정약용이 감사 편지를 보냈다고 하죠.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