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생물 멸종 대비해 씨앗 보관하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
입력 : 2021.07.13 03:30
시드볼트(Seed Vault)
- ▲ /그래픽=안병현
각국 정부는 식물의 멸종을 막고 육성과 복원을 위한 종자 저장 시설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중에서 '시드볼트'는 전 세계 단 두 곳밖에 없어요. 시드볼트는 씨앗(seed)과 금고(vault)를 합친 말이에요. 지구는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전쟁이나 핵폭발, 소행성 충돌 등 예기치 못한 대재앙으로 생물이 대규모로 멸종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해요. 시드볼트는 인류에 이런 대재앙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 식물 종자들을 보관해요. 이 때문에 '지구 최후의 날 저장고'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 불립니다. 시드볼트는 왜 필요하고, 어떻게 운영될까요?
식물이 중요한 이유
생태계는 먹이사슬에 따라 서로 먹고 먹히면서 유지돼요. 먹이사슬 맨 밑에 위치하는 식물은 태양 에너지를 통해 광합성을 하고 포도당과 산소를 만들어내요. 식물이 없으면 다른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들은 성장하고 번식하기 어려워요. 지구 최초의 생명체가 식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만약 지구상 모든 생물이 사라지더라도 생산자인 식물만 다시 키울 수 있다면, 다른 생물체들도 언젠가 등장할 것이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식물이 멸종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은 인류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2008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월·E'도 인류에게 식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 속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인류가 더 이상 살지 않고 로봇들만 남아 쓰레기를 청소해요. 700년간 대부분 로봇은 고장나고 주인공 월·E만 혼자 작동하고 있죠. 그때 새로운 로봇 이브(EVE)가 식물을 찾기 위해 지구에 파견돼요. 이브 이름은 '외계 식생 평가사(Extraterrestrial Vegetation Evaluator)'의 줄인 말이래요. 지구에서 식물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해야 인간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설정이죠.
지하 터널 형태의 백두대간 시드볼트
식물 씨앗인 '종자'는 겉이 단단한 껍질로 싸여 있어서 살기 적당한 환경이 될 때까지 휴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는 것과 비슷해요. 식물에 따라 휴면 기간은 수주에서 수년에 이른다고 해요.
종자를 장기 보관하는 시드볼트는 전 세계를 통틀어 단 두 군데밖에 없어요. 2008년 건립된 노르웨이 스피츠베르겐섬의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와 2015년 우리나라 경북 봉화군에 세워진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입니다. 두 곳 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종자를 받아 무료로 보관해줘요.
백두대간 시드볼트는 해발고도 600m에 세워져 있는데, 동그란 버섯 모양이에요. 지하 46m에 터널을 뚫어 종자들을 그곳에 보관하고 있어요. 두께 60㎝ 강화 콘크리트와 3중 철판 구조로 되어 있고, 출입이 매우 철저하게 통제돼요. 규모 6.9의 지진을 버틸 수 있는 내진 설계는 물론, 전쟁 등 혹시 모를 전력 중단에 대비해 자가 발전기도 운영해요. 내부는 종자가 깨어나지 않도록 영하 20도와 상대 습도 40% 이하를 유지해요. 200만점 이상 종자를 보관할 수 있는데, 지난 3월 기준 9만5395점이 있습니다.
북극 근처에 있는 스발바르 시드볼트
우리나라 시드볼트가 야생 식물 종자를 보관하는 것과 달리, 노르웨이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식량 자원 역할을 하는 작물 종자를 보관하고 있어요.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북극에 가까워 매우 추워요. 산 중턱을 수평으로 100m 뚫어 만든 터널 끝에 방 3개를 배치했어요. 방마다 종자 150만개를 저장할 수 있는데, 현재 방 하나에 우리나라와 북한·미국 등 전 세계에서 온 111만 종자를 저장하고 있어요. 방이 다 차면 다른 방을 사용해요. 이 시드볼트는 내부를 영하 18도로 유지해주는 쿨링 시스템을 운영해요. 만약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바깥이 영하 3~4도를 유지하는 영구동토층(지층 온도가 연중 섭씨 0도 이하로 얼어 있는 땅)이라 종자들이 깨어날 위험이 덜하다고 합니다.
시드볼트는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한번 들어온 종자를 절대 반출하지 않아요. 백두대간 시드볼트 종자는 한 번도 반출된 적이 없고,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2015년 9월 시리아에서 내전으로 종자은행이 무너지고 먹거리가 부족하자 종자 샘플 130개 정도를 딱 한 번 꺼내 준 적이 있다고 합니다.
[700년만에 핀 '아라 홍련']
2009년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에서 문화재 발굴 도중 약 700년 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연꽃 씨앗이 발견됐어요. 이 씨앗을 이듬해 심었더니 꽃이 폈어요. 기존 연꽃 중 같은 종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 살다 멸종한 것으로 추정됐어요. 함안 지역이 옛 아라가야였다는 점에서 '아라 홍련'<사진>이란 이름이 붙었어요. 당시 씨앗은 진흙과 낙엽이 켜켜이 쌓인 '부엽층' 안쪽 진공 공간에 박혀 있어 썩지 않고 싹도 틔우지 않은 채로 오랜 세월 보존된 것으로 추정됐어요. 이렇게 종자를 보관해두면 어떤 종이 멸종된 후에도 다시 복원할 수 있는 거지요.
- ▲ /함안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