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한양으로 정한 게 무학대사라고?… 이성계가 했어요
무학대사와 한양 천도
- ▲ /그래픽=안병현
최근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회암사가 있던 절터)에 있는 사리탑이 보물로 지정됐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회암사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머물렀던 절로 유명한 곳이에요. 태조와 절친했던 승려 무학대사(1327~1405·법명은 자초)의 유골이 있는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역시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태조와 무학대사'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한양 천도(遷都·수도를 옮김)'를 떠올릴 텐데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한양은 지금의 서울이에요.
왕십리, 북한산 비석, 잘못 지은 경복궁?
<이야기 1> 1392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현재 개성)을 떠나 새로운 도읍을 찾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당시 왕사(王師·임금의 스승 역할을 한 승려)였던 무학대사에게 "새 도읍지가 될 만한 곳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여러 곳을 다니던 무학대사는 마침내 한강 북쪽에서 '여기가 좋겠다'고 생각하며 앉아 쉬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때 소를 끌고 가던 노인(아이라는 속설도 있음)이 "이런 무학같이 미련한 소야"라고 외쳤습니다. 무학대사는 깜짝 놀랐어요. '내가 무학이란 것과 뭐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 보니 예사 사람이 아니구나!' 그가 노인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하자 노인은 "여기서 10리를 더 가시오"라고만 하고 훌쩍 사라졌어요. 그래서 그곳을 갈 왕(往) 자에 십리(十里)를 더해 '왕십리'라고 부르게 됐답니다.
<이야기 2> 노인의 말에 따라 10리를 더 간 무학대사는 이 산 저 산을 다니다 어느 산봉우리에 올랐는데 웬 낡은 비석이 눈에 띄었어요. 다가가 보니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로 올 것이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 말 도선대사가 쓴 글이었다네요. 놀란 무학대사는 글자를 지워 버리고 산에서 내려와 한양 도성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고 해요. 그 봉우리는 북한산 비봉이었습니다.
<이야기 3> 한양 궁궐터를 잡은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집터의 뒤에 있는 산)으로 삼고 궁전을 동향으로 지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남향으로 지어야 한다"고 반대해서 그 말대로 경복궁을 짓게 됐어요. 무학대사는 "이렇게 하면 200년 뒤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했는데, 과연 조선 개국 20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지어낸 얘기일 것"
이 세 가지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셋 다 설화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가장 먼저 꾸며낸 얘기임이 드러난 것은 '이야기 2'입니다. 1816년(순조 16년) 비봉에 오른 추사 김정희는 그 비석이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라는 걸 밝혀냈어요. 세월이 흘러 글자가 비바람에 깎인 탓에 잘 보이지 않아 '몰자비(글자 없는 비석)'로 알려졌고, 누군가 도선대사 얘기를 지어냈던 겁니다. '이야기 1' 역시 나중에 갖다 붙인 얘기일 가능성이 커요. '왕십리'가 고려 때 이미 발음이 같은 '왕심리'로 불렸기 때문이에요. '이야기 3'은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학계에선 임진왜란 이후 나온 이야기로 보고 있습니다.
무학대사가 한양 천도 논의에 참여한 것은 맞아요. 하지만 '한양 천도는 무학대사가 한 일'이라는 속설과 달리, 정작 실록을 보면 그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한양 천도논의 도중 "(한양은) 네 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하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하시라"고 거드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학계에선 "임진왜란의 원인을 찾으려다 보니 무학대사 설화가 등장했고, 그때 무학대사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났다는 이야기가 유행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국토의 중앙, 한강이라는 큰 물길
한양을 수도로 정한 결정적 요인은 정치·경제적 장점이었습니다. 장지연 대전대 교수는 "국토의 중앙이라는 입지 조건과 한강 이 있어 조운(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의 소통이 원활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왕과 조정의 정치력이 지방 곳곳에 미치는 중앙집권적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을 한양이 갖추고 있었다는 거죠.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당시 한양이 완전히 새로 개척해야 하는 신도시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미 고려 시대인 1067년(문종 21년) 삼각산 아래 일종의 지방 행정 중심지인 남경(南京)을 설치하고 이듬해 궁궐을 지었던 적이 있어요. 개발된 지 300년 넘게 지나 교통망 등 인프라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보면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 천도를 주도한 사람은 무학대사보다는 이성계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한양 천도와 관련된 역할에 과장이 있었다고 해서, 무학대사가 왕사로서 조선 건국에 미친 업적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가 될 뻔했던 계룡산과 무악산]
조선 초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1392년 7월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는 이듬해 "아늑하고 비옥하며 군사 방어에 좋다"는 이유로 계룡산 남쪽을 새 도읍지로 정한 뒤 건설 공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1393년 말 "남쪽에 치우쳐 있고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개국공신 하륜의 의견을 수용해 천도를 취소했습니다. 지금 그 일대에는 충남 계룡시와 3군 사령부가 들어서 있습니다.
하륜은 계룡산 대신 무악(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안산)을 추천했습니다. 당시 한양은 지금 서울보다 구역이 좁아서, 무악도 한양 밖이었어요. 무악에 대해서는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고, 태조는 1394년 8월 무악과 한양을 돌아보는 답사 여행을 거쳐 한양을 새 수도로 정했습니다. 태조가 거처를 한양으로 옮긴 것은 두 달 뒤인 10월이었습니다.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물러난 뒤 2대 임금 정종은 1399년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겼고, 3대 태종 때인 1405년 다시 한양으로 천도해 나라의 수도를 한양으로 최종 확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