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청나라서 문화 충격… "오랑캐 따위? 배울 건 배워야지"
입력 : 2021.06.24 03:30
연암 박지원
- ▲ /그래픽=안병현
경제 발전한 청나라 보고 충격받았어요
"아니 저런! 평범한 백성들도 벽돌을 쌓아 2층집을 짓고 살잖아?"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 사절을 따라 중국에 갔던 박지원은 벽돌로 만든 청나라의 민가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문만 닫으면 금고처럼 돼 도둑이 들어가지 못하겠네. 우리 조선 사람들은 벌레가 우글거리는 초가집에서 살고 있는데…." 중국 도시마다 시장이 번창하고, 도로와 교량이 잘 정비돼 수레나 선박 교통이 원활한 것도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었습니다.
왜 이런 '문화 충격'을 받았던 걸까요? 활발한 해상 무역을 벌였던 고려 때와는 달리 조선 왕조는 1876년 개항 전까지 선진 문물을 전파받을 수 있는 통로가 사실상 중국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새로운 중국 왕조로 들어서자, 조선 사대부들은 '오랑캐의 나라'라고 멸시하며 청나라의 문물조차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조선이 낙후돼가는 동안 정치적 안정을 찾은 청나라는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죠.
"배울 건 배워야지! 우리도 벽돌과 수레를 널리 쓴다면 훨씬 잘 살 수 있을 텐데…." 중국에서 돌아온 박지원은 훗날 고전이 된 견문록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썼습니다. 이 책에서 청나라의 장점을 본받는다면 국내 산업과 문명의 수준을 높이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부국론(富國論)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선 깨진 기와 조각으로 담과 뜰을 꾸미고 버려진 똥을 알뜰히 거둬들여 거름으로 비축한다"며 철저한 실용 정신을 높이 샀죠.
풍요롭게 사는 게 도덕보다 먼저일세
서울의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던 박지원은 젊어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고, 50세가 돼서야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박제가·유득공·홍대용·이덕무 같은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죠. 박지원은 '정치, 사회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선(先) 이용후생(利用厚生), 후(後) 정덕론(正德論)'이라고 합니다. '이용후생', 즉 '기구를 편리하게 써서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먼저고, '정덕', 즉 '덕을 바로 세워 도덕적으로 교화(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하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라는 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대다수 조선 성리학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죠. 박지원은 농업 기술과 생산에 대해 다룬 '과농소초'를 쓰기도 했습니다.
백성은 족쇄 풀고, 양반은 양반답게
박지원이 쓴 '허생전'과 '양반전' 등은 한국 문학사의 중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허생전'은 독과점(한 개인이나 단체가 시장의 이익을 독차지함) 판매로 큰돈을 번 주인공 허생이 도적들을 섬으로 데려가 살게 한다는 이야기로 '상업을 진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해석돼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엔 허생이 벌어들인 거금을 바다에 버리거나 빈민 구제에 썼다는 점을 지적하며 "박지원은 백성이 권력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이상 사회를 꿈꾼 일종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다"(강명관 부산대 교수)고 주장하는 새로운 해석이 나왔습니다.
'양반전'은 지체 낮은 신분의 부자가 가난한 양반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양반 신분을 사려다가 양반의 온갖 거추장스러운 '행동 지침'을 듣고 놀라 포기한다는 줄거리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신분제를 없애자는 주장을 담았다'는 해석이 있었는데, 최근엔 "고리타분하고 무능한 양반을 풍자한 것일 뿐 신분제 철폐와는 무관한 작품"(계승범 서강대 교수)이란 의견이 나왔죠. 새로운 해석이 다 맞는다면, 박지원은 백성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국가의 지나친 억압이 없길 바랐고, 그러면서도 신분제 자체를 없애기보다는 양반이 '선비다운 선비'로 거듭나기를 희망했던 개혁가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유머 감각 풍부했대요]
지금 전해지는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는 손자인 박주수가 그린 작품이에요. 풍채가 당당하고 눈빛이 대단히 날카로운 인상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외모와는 달리 무척 유머 감각이 풍부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열하일기'에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걱정을 하는 사신단을 보고 혼자서 '잘못돼서 귀양 가면 중국 이곳저곳 구경하고 다니겠네!'라 생각하며 흐뭇해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주점에 들어갔다가 인상 험악한 손님들이 득실거리는 걸 보곤 큰 그릇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벌컥 마셔버려 주변 사람들 기를 죽였다는 일화도 적었죠.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전에 보낸 쇠고기 장조림은 잘 받아서 아침저녁 반찬으로 먹고 있니? 왜 한 번도 좋은지 나쁜지 말이 없니? 무심하다 무심해"라고 시시콜콜 적은 것이 있는데 '요즘 엄마·아빠가 자취하는 자식들한테 보낸 문자 같다'며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