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대거 석방된 日 전범… 나중에 총리 된 사람도 있어요

입력 : 2021.06.23 03:30

뉘른베르크·도쿄 전범 재판

1948년 11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죄를 심판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도조 히데키(왼쪽) 전 총리 등 A급 전범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어요. 같은 이유로 1945년 11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뉘른베르크군사재판에 전범 피고인들이 앉아 있어요. 맨 뒤에는 미군 헌병들이 서있어요. /위키피디아·홀로코스트 기념관
1948년 11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죄를 심판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도조 히데키(왼쪽) 전 총리 등 A급 전범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어요. 같은 이유로 1945년 11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뉘른베르크군사재판에 전범 피고인들이 앉아 있어요. 맨 뒤에는 미군 헌병들이 서있어요. /위키피디아·홀로코스트 기념관
지난 7일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일본의 A급 전범(戰犯·전쟁범죄자) 7명을 화장한 유골이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다는 내용이 담긴 미군 문서를 발견했다는 보도가 나왔어요. 그동안 이들의 유골이 태평양이나 도쿄만에 뿌려졌다는 추측은 있었지만, 공식 문서가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들은 2차 세계대전 후 열린 도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벌됐어요. 도쿄 말고도 전범을 단죄하려는 국제 군사재판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도 열렸어요. '전범 단죄'라는 같은 취지로 시작했지만, 과정과 결과에선 다른 점이 많았어요.

세계대전 후 '전범 단죄' 인식 생겼어요

19세기까지만 해도 '국가'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가 없었어요. 침략 전쟁 자체도 '주권을 가진 국가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인식이 강했죠. 그러나 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면서 전쟁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어요.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처벌하려 했어요. 하지만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네덜란드는 송환을 거부해 실제 처벌은 못 했죠.

전쟁범죄를 저지른 개인에 대한 처벌이 실제 이뤄진 건 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예요.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승전국들이 일본에 항복을 권고한 '포츠담 선언'에는 전쟁범죄자를 처벌할 근거 조항도 들어 있었어요. 같은 해 8월엔 나치 전범의 처벌 근거가 되는 런던 협정도 체결됐죠. 포츠담 선언과 런던 협정에 근거한 전범 재판은 각각 도쿄와 뉘른베르크에서 열렸죠.

연합국들은 전쟁범죄자를 A·B·C급으로 구분했어요. A급은 침략 전쟁을 기획하고 수행한 사람(평화에 대한 죄), B급은 살인, 포로 학대, 약탈 등을 저지른 사람(통상의 전쟁범죄), C급은 상급자 명령에 따라 고문과 살인을 한 사람(인도적 범죄)이에요. B급과 C급 인사에 대한 재판은 전범이 소속된 나라에서 처리했고, A급만 국제재판소에서 다뤘어요.

지금도 계속되는 나치 전범 청산

뉘른베르크 재판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열렸어요. 재판부는 영국·미국·프랑스·소련 등 연합국들이 1명씩 추천한 재판관으로 구성됐어요. 나치 독일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A급 전범 24명이 기소됐죠. 히틀러와 그의 최측근 괴벨스는 체포되기 전 자살해서 기소할 수 없었어요. 기소된 24명 중 자살과 질병으로 제외된 2명을 빼고 22명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어요. 이 중 19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는데, 12명에겐 교수형이 내려졌어요. 3명은 종신형, 4명은 징역 10~20년형을 받았고요. 나치의 2인자였던 괴링은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 하루 전 자살했고 나머지 사형수는 모두 교수형이 집행됐어요. 사형이 집행된 전범 시신은 나치 추종자들이 찾을 수 없게 비밀리에 화장해 강에 뿌렸습니다. 이 재판 후 1946년 12월부터 1949년 3월까지는 유대인 집단 학살에 관한 재판을 열었어요. 여기선 유대인 집단 학살에 관여한 의사, 관료, 법률가 등 185명이 기소되어 25명에겐 사형이, 20명에겐 무기징역이 선고됐습니다.

독일의 나치 전범 처벌은 이에 그치지 않았어요. 동·서독은 뉘른베르크 재판 후 국내 형법에도 전범 처벌 규정을 만들어 스스로 단죄에 나섰죠. 전쟁범죄의 공소시효도 없앴어요. 이런 이유로 종전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나치에 동조한 이들이 재판대에 서고 있답니다.

A급 전범 상당수 석방됐어요

도쿄 재판의 정식 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이에요. 1946년 2월,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는 미국·중국·영국·소련·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프랑스·네덜란드·뉴질랜드·인도·필리핀이 1명씩 추천한 재판관 총 11명과 미국인이 이끄는 검찰단으로 이뤄진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구성했어요. 재판은 미국 등 서구 중심으로 운영됐고 우리나라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일본 침략 피해를 입은 아시아 국가들은 참여하지 못했어요.

같은 해 4월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된 인사들 가운데 도조 히데키 등 28명이 기소됐어요. 1948년 11월 재판 도중 사망 또는 정신 장애가 있었던 3명을 제외한 25명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이 중 7명은 사형 판결을 받아 같은 해 12월 23일 교수형이 집행됐죠. 하지만 나머지 기소된 A급 전범들과 전범 용의자였지만 불기소 처분된 인사들은 추후 모두 석방됐어요. 당시 미국은 소련과 냉전이 격화되던 정세를 고려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일본이 정치적 혼란에 빠지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석방에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들을 직접 설득하기도 했어요. 석방된 전범 중엔 훗날 총리가 된 기시 노부스케도 있었어요.

도쿄 재판 기소 대상에서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빠진 것도 논란이었어요. 당시 미국은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이 일본을 점령·통치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다고 해요. 또 일본이 식민지에서 자행한 반(反)인도적 범죄에 대해선 제대로 단죄가 이뤄지지 않은 점도 문제로 꼽히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이 반인도적 범죄로 처벌받은 것과 비교됩니다. 특히 재판 이후 일본의 모습은 나치 전범 청산을 위해 스스로 노력해온 독일과 크게 달랐어요. 일본 지도부는 오히려 도쿄 재판의 합법성 자체를 부정하는 행태를 보여 국제적 비판을 받았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