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모계 유전자'의 비밀… 아이의 키·질병·수명에 영향줘요

입력 : 2021.06.08 03:30

미토콘드리아의 힘

/그래픽=유재일
/그래픽=유재일
2019년 우리나라 고3 남학생의 평균 키는 173.8㎝로, 1965년(163.6㎝)보다 10㎝ 정도 컸어요. 54년 전보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이 크게 올라가면서 영양 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최근 수년간은 학생들 키 성장이 주춤하거나 오히려 줄었다고 해요. 전문가들은 운동과 수면 부족 등을 이유로 분석하고 있어요.

우리의 키는 엄마·아빠에게서 물려받는 유전 영향이 80%, 환경 영향이 20%씩 작용해 결정된다고 해요. 그렇다면 부모 중엔 누구 영향을 더 많이 받을까요? 키를 포함한 신체적 특징들은 보통 엄마·아빠 양쪽 유전자를 50%씩 물려받아요. 키에 관련된 유전자는 수십만 개나 되기 때문에 아이 키를 정확히 예측하긴 쉽지 않지만, 대체로 엄마·아빠 둘 다 키가 크면 아이도 키가 클 확률이 높죠.

그런데 최근 아이의 키에 엄마 쪽 유전자가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바로 엄마에게서만 물려받는 미토콘드리아 속 DNA가 아이 키와 질병·수명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내용이에요.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네이처 제네틱스'에 발표했어요. 미토콘드리아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까요?

엄마만 전해준다!

사람 몸은 60조개 이상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어요. 세포에는 세포핵·미토콘드리아·소포체 등 여러 기관이 들어 있고요. 그런데 유전 물질인 DNA는 99.9%가 세포핵에 있어요. 세포핵 속 DNA는 엄마와 아빠의 난자와 정자가 수정될 때 양쪽에서 절반씩 물려받은 거예요. 반반씩 섞이기 때문에 엄마·아빠 어느 한 쪽의 DNA 구성과 똑같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아빠가 'AABB', 엄마가 'CCDD'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자녀의 DNA는 'ACBD'가 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섞인 DNA는 다양한 신체적 특징을 만들어냅니다.

나머지 0.1% DNA는 바로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에 있어요. 미토콘드리아 속 DNA는 세포핵의 DNA와 달리 엄마에게서만 물려받는 게 특징이에요. 엄마의 난자, 아빠의 정자도 하나의 세포예요. 미토콘드리아는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 양쪽 모두에 들었지만, 아빠 정자 속 미토콘드리아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될 때 정자 스스로 파괴해버리기 때문에 자식에게 유전되지 않아요. 미토콘드리아는 정자의 꼬리 부분에 들어 있는데 정자가 수정될 때 이 부분을 스스로 분해해 버린다고 해요.

크기 작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미토콘드리아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세포 속 소(小)기관이에요. 세포들이 활동할 때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어서 공급하거든요. 자동차 엔진이 휘발유로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을 에너지로 바꿔주는 역할을 해요. 미토콘드리아는 우리가 숨 쉴 때 몸속에 들어온 산소를 이용해서 음식 영양소를 분해하고 세포가 이용할 수 있는 형태의 에너지(ATP)로 만들어냅니다.

세포 하나에는 미토콘드리아가 200~1000개씩 들어 있어요. 일을 많이 하는 간(肝)세포 하나에는 1000개 넘게 들어 있죠. 우리 몸은 60조개 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그 속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미토콘드리아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할 거예요. 엔진 없이 자동차가 움직일 수 없듯,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어요.

미토콘드리아의 중요한 역할은 또 있어요. 미토콘드리아 속 DNA에 돌연변이가 발생하거나 이상이 생기면 우리는 당뇨병, 파킨슨병, 간질, 만성 외안근 마비 등 난치병에 걸릴 수 있어요. 이 때문에 미토콘드리아와 관련된 이런 유전 질환들을 '미토콘드리아 질환'으로 따로 분류해요.

키·수명에도 영향 미친대요

보통 미토콘드리아 속 DNA 중 돌연변이가 있는 사람은 여성 10명 중 1명꼴이에요. 그런데 관련 난치병을 앓는 여성은 1만명 중 0.5~1명 정도로 훨씬 적었죠.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의문을 가졌어요. 또 생명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가 특정 유전 질환들만 일으키는 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자들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미토콘드리아 DNA를 자세히 연구했어요. 40~69세 여성 50만2682명을 대상으로 미토콘드리아 DNA와 신체 지수, 수면 시간, 식사 패턴 같은 생활 습관, 각종 건강 지표를 비교했죠.

결과는 놀라웠어요. 미토콘드리아 DNA 돌연변이가 유전병뿐 아니라 일반 질병들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예요. 성인 당뇨로 알려진 2형 당뇨병, 간과 신장 기능, 빈혈 같은 질환 발병 위험을 높인다는 것이었어요.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이런 일반 질병들을 미토콘드리아 DNA 돌연변이와는 연관 짓지 않았거든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내 아이의 키 같은 신체적 특징과 수명도 미토콘드리아 DNA 돌연변이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냈어요. 예를 들어, 엄마의 미토콘드리아에 이상이 있으면 자식의 키가 평균보다 작을 수 있다는 거예요. 또 엄마의 미토콘드리아가 자식이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에도 영향을 준다고 해요. 엄마에게 물려받는 미토콘드리아에 든 0.1% DNA가 이렇게 큰 역할을 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미토콘드리아 이브]

엄마 쪽 미토콘드리아만 유전된다는 사실은 '인류의 조상 찾기'에 응용됐어요. 1987년 앨런 윌슨 미국 버클리대 교수 등 연구진은 전 세계 여성 135명을 뽑아 미토콘드리아 속 DNA를 추출해 가계 혈통을 추적한 결과, 15만년 전쯤 아프리카에 살던 한 여성이 인류의 공통 조상으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를 네이처지에 발표했어요. 이 여성은 인류의 여자 조상이란 뜻에서 '미토콘드리아 이브(Eve)'라고 불러요.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