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당신 나이가 80이라도"

입력 : 2021.05.31 03:30

노장 화가들의 '역작'

①천경자 ‘모자 파는 그라나다의 여인’(1993) ②천경자 ‘목화밭에서’(1954). /서울시립미술관
①천경자 ‘모자 파는 그라나다의 여인’(1993) ②천경자 ‘목화밭에서’(1954). /서울시립미술관
다음 달 51번째 생일을 맞는 미국 골프선수 필 미켈슨이 지난주 미국에서 열린 PGA(미국프로골프) 챔피언십에서 우승해 역대 메이저 골프 대회 최고령 우승 기록을 세웠습니다. 신체 역량이 뛰어난 젊은이들이 수두룩한 스포츠 분야에서 노장 선수가 당당히 우승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요. 노장이란 경험이 많고 노련한 나이 든 사람을 뜻해요. 74세 윤여정 배우가 올해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 조연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요즘 각계에서 노장들의 활약이 눈에 띕니다. '나이 들었다'는 말이 이제는 '경쟁이나 유행에 뒤처졌다'는 뜻으로 들리지 않는 세상이 된 것 같아요.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시대가 열린 것이죠.

미술계에도 노장들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짧고 왕성하게 작업해 이름을 떨친 화가가 있는가 하면, 평생 붓을 놓지 않고 그림과 함께 살며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도 있어요. 장수한 화가들의 경우는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삶의 관심사가 바뀌고, 그 변화가 그림 속에 녹아들곤 합니다.

천경자가 31세와 70세 때 그린 그림

〈그림1〉
은 윤여정 배우와도 친분이 있었던 화가, 천경자(1924~2015) 화백이 70세 때 그린 '모자 파는 그라나다의 여인'입니다. 스페인 그라나다를 여행할 때 모자 파는 여인을 스케치했던 것을 바탕으로 완성한 그림이에요. 이 그림을 천 화백이 서른한 살에 그린 '목화밭에서'<그림2>와 비교해보세요. 남편과 아이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린 '목화밭에서'는 가족 속에 있지만 왠지 홀로 외로워 보이는 여인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모자 파는 그라나다의 여인'에서는 쓸쓸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건강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듭니다. 천경자는 할머니가 되어가면서 생각이 더 자유로워지고 활동 범위도 더 확장된 듯합니다.

마흔 중반이 된 1960년대 후반부터 천경자는 남태평양의 섬, 아프리카의 나라들, 남미와 인도네시아 등으로 긴 스케치 여행을 떠나곤 했어요. 당시는 지구 반대편까지 가는 먼 세계 여행이 지극히 드문 시절이었고, 여자 혼자서 하는 여행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때였지요. 천경자는 여행을 하면서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매력에 눈을 뜨게 돼요. 열대 지방의 뜨거운 태양과 이국적인 원색의 옷을 입은 그곳 여인들, 그리고 열대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경험을 계기로 천경자의 그림 속에 이국적인 여인과 꽃이 주된 소재로 등장하게 됩니다.

시력 때문에 그림 대신 도자기 빚은 오키프

우리나라에 천경자가 있다면 미국에는 조지아 오키프(1887~1986)가 있습니다. 천경자처럼 뜨거운 태양의 느낌을 에너지 삼아 평생 그림을 그린 화가지요. 그는 태양이 뜨거운 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를 좋아했어요. 〈그림3〉은 오키프가 74세 때 뉴멕시코 사막의 태양 아래 작업하는 모습을 사진가가 찍은 것입니다. 1930년 어느 날, 마흔이 갓 넘은 오키프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동물들이 굶어 죽은 채 앙상한 뼈로 남은 모습을 봅니다. 이상하게도 그 뼈를 보면서 살아있는 다른 어떤 것에서보다 더 강렬하게 살아있음에 대한 애착을 느끼지요. '캘리코 장미가 있는 소의 뼈'<그림4>는 사막의 햇빛을 받아 밤에도 반짝반짝 빛을 내는 소의 두개골을 주워 와서 그린 작품입니다. 오키프는 마치 묘지에 꽃을 장식하는 마음으로 뼈 위에 흰 꽃을 함께 그려 넣지요. 이 그림은 언뜻 보기에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뼈는 어느 생명이 살아있었음을 말해주는 분명한 흔적이고 햇빛을 받은 뼈는 마치 살아있는 듯 빛을 발하니까요.

오키프는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예술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산타페에서 노년을 보내기로 합니다. 백 살까지 살았으니 거의 40년을 거기서 머무른 셈이지요. 오키프는 마지막 10여 년은 눈이 나빠져 그림 작업을 거의 할 수가 없었는데, 대신 도자기를 빚으며 작업을 계속 했다고 해요. 신체의 노쇠가 창작 열정을 이길 수는 없었나 봅니다.

76세에 시작, 100세에 국민화가 된 모지스

미국에서 친근하게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는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1860~1961)는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평생 농장에서 살았던 그는 관절염 때문에 취미 활동인 자수를 못하게 되자 바늘 대신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어요. 그는 그림을 그린 지 5년 만인 80세에 개인전을 열었고, 93세엔 미국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 총 1600점의 작품을 남겼어요. 그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미국의 시골 풍경 그림<그림5>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어요. 모지스의 그림은 식탁보와 앞치마, 커튼과 그릇 등 미국의 온갖 가정용품 속에 등장하지요. 그가 그린 포근한 분위기의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은 1억장 넘게 팔렸다고 합니다. 모지스 할머니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신이 기뻐하며 성공의 문을 열어 주실 겁니다. 당신 나이가 이미 80이라 하더라도요."
③토니 바카로 ‘사막에서 그림을 그리는 조지아 오키프’(1960) ④조지아 오키프 ‘캘리코 장미가 있는 소의 뼈’(1931). /조지아오키프뮤지엄·시카고미술연구소·스미스소니언미술관
③토니 바카로 ‘사막에서 그림을 그리는 조지아 오키프’(1960) ④조지아 오키프 ‘캘리코 장미가 있는 소의 뼈’(1931). /조지아오키프뮤지엄·시카고미술연구소·스미스소니언미술관
⑤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대도시로 가는 모지스 할머니’(1946). /조지아오키프뮤지엄·시카고미술연구소·스미스소니언미술관
⑤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대도시로 가는 모지스 할머니’(1946). /조지아오키프뮤지엄·시카고미술연구소·스미스소니언미술관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