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말 목 베고 헤어진 연인… 넋 위로하려 절 지었대요

입력 : 2021.05.20 03:30

천관사에 얽힌 김유신 이야기

 /죠. 이는 몇 대에 걸쳐 끊임없이 주류 귀족
사회 속으로 들어가려 애쓰던 김유신 집안
의 노력과 관련 있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여
인을 가까이하다가 귀족과 결혼하는 데 지
장이 있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훗날 김유신은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희를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정략적으로 결
혼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정략 결혼은 부모
가 자기가 이루려는 목적을 위해 당사자 의
사를 묻지 않고 결혼을 시키는 것이에요. 김
유신과 김춘추는 바로 나중에‘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사람들이니, 가야 출신 가문의
신분 상승 욕구가 한국사의 큰 흐름까지 바
꿔 놓은 셈입니다. 유석재 기자
신분 낮은 천관과 만나 부모 실망
그녀 집에 데려다 준 말 죽였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천관사에 얽힌 김유신 이야기
/죠. 이는 몇 대에 걸쳐 끊임없이 주류 귀족 사회 속으로 들어가려 애쓰던 김유신 집안 의 노력과 관련 있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여 인을 가까이하다가 귀족과 결혼하는 데 지 장이 있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훗날 김유신은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희를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정략적으로 결 혼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정략 결혼은 부모 가 자기가 이루려는 목적을 위해 당사자 의 사를 묻지 않고 결혼을 시키는 것이에요. 김 유신과 김춘추는 바로 나중에‘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사람들이니, 가야 출신 가문의 신분 상승 욕구가 한국사의 큰 흐름까지 바 꿔 놓은 셈입니다. 유석재 기자 신분 낮은 천관과 만나 부모 실망 그녀 집에 데려다 준 말 죽였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천관사에 얽힌 김유신 이야기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340호 '경주 천관사지'에서 통일신라 시대 석등 유물을 누군가 훔쳐갔다는 사실이 알려졌어요.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천관사지는 옛날에 '천관사'라는 절이 있던 절터입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신라에서 아주 유명했던 역사적 인물 한 명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바로 '삼국 통일의 영웅'으로 알려진 김유신(595~673)입니다.

"여자와 술만 마시느냐" 꾸중 들었어요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입니다. 이 노래 2절은 '말 목 자른 김유신'으로 시작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고려 시대 학자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이란 책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젊은 시절 화랑이었던 김유신은 천관이라는 여인과 사귀었어요. 이를 알게 된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이 아들을 꾸짖었습니다. "네가 공을 세워 임금과 부모를 영광스럽게 할 날을 밤낮으로 고대했는데, 여자와 술이나 마시고 있구나"라면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고 해요. 김유신은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그 집 앞을 지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지요.

어느 날 김유신은 술에 취해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어요. 김유신의 말은 술 취한 주인이 늘 가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 앞으로 갔습니다. 이를 본 천관은 반갑게 김유신을 맞았지요. 그런데 정신을 차린 김유신이 칼을 빼내 들더니 말을 죽이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감히 주인의 맹세를 헛되게 했다'는 뜻이었겠죠.

천관은 김유신을 원망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고, 세월이 흘러 그가 살던 집터에 천관사라는 절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지금은 절터와 건물 잔해만 남았어요. 그런데 1974년 이곳에서 나온 돌 조각에 '대태각(大太角)'이라고 새겨진 것이 확인됐죠. 사람들은 이것이 서기 668년 김유신이 오른 벼슬인 '태대각간(太大角干)'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어요. 태대각간은 신라 관직 17등급 가운데 1등급인 '각간'보다도 두 등급이나 높은 지위예요. 신라 1000년 역사상 김유신 한 명뿐이었기 때문에, 김유신을 위해서 만든 직함이죠. 세월이 흘러 74세가 된 김유신이 옛 연인의 집을 다시 찾아 그녀의 넋을 위로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지요.

가야 출신 귀족의 '신라 인싸(주류)' 되기

그런데 김유신은 왜 늙어서까지 잊지 못했던 연인과 헤어져야 했던 것일까요? 천관이라는 여성에 대해서 '파한집'은 술집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천관(天官)이라는 이름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일종의 무당'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라 해도 귀족인 김유신 집안에서 보기에 그다지 높은 신분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김유신 집안의 상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김유신은 진골 귀족이었지만 당시 신라에선 비주류(아웃사이더)였습니다. 그의 조상은 신라 출신이 아니었어요. 증조할아버지는 가야연맹의 한 나라였던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이었습니다.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해 신라 귀족이 됐지만, 기존 신라 귀족들이 순순히 같은 귀족으로 받아들였을 리 없죠.

망한 나라의 후예로서 살아남으려면 기존 신라 귀족과 똑같아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고대국가에서 신분을 높이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었어요.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554년 백제와 싸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전사하는 데 큰 공을 이루고 각간까지 올랐어요. 17등급 중 최고위직까지 올랐던 거죠.

그러나 여전히 주류 귀족들에게서 은근한 따돌림이 계속됐던 모양입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인싸(주류)'와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진흥왕의 조카인 만명부인과 길에서 만나 중매 없이 결혼했는데, 분노한 장인은 아내를 별채에 가둬버렸어요. 갇혀 지내던 만명부인은 어느 날 벼락이 쳐서 다들 정신이 없을 때 창문으로 몰래 탈출했다는 얘기가 '삼국사기'에 나옵니다.

처남과 매부가 만나 역사를 바꿨어요

이렇듯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사랑을 택한 만명부인은 아들을 엄하게 길렀던 것이죠. 이는 몇 대에 걸쳐 끊임없이 주류 귀족 사회 속으로 들어가려 애쓰던 김유신 집안의 노력과 관련 있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여인을 가까이하다가 귀족과 결혼하는 데 지장이 있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훗날 김유신은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희를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정략적으로 결혼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정략 결혼은 부모가 자기가 이루려는 목적을 위해 당사자 의사를 묻지 않고 결혼을 시키는 것이에요. 김유신과 김춘추는 바로 나중에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는 사람들이니, 가야 출신 가문의 신분 상승 욕구가 한국사의 큰 흐름까지 바꿔 놓은 셈입니다.


[신라의 골품제와 17관등]

신라의 신분 제도를 '골품제'라고 합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은 왕족인 '성골'이었는데 654년 죽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사라졌고, 이후 그다음 단계인 '진골'에서 왕이 나왔습니다. 그 아래 신분은 하급 귀족에 해당하는 6두품, 5두품, 4두품이었습니다. 6두품은 신라의 17등급 관직 중에서 1등급인 이벌찬(또는 각간), 2등급 이적찬(또는 이찬), 3등급 잡찬, 4등급 파진찬, 5등급 대아찬에는 오를 수 없었고, 6등급 아찬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이었습니다. 5두품은 10등급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 대사까지만 오를 수 있었죠. 신라가 발해를 건국한 고왕(대조영)에게 5등급 대아찬 벼슬을 준 것은 발해로선 탐탁지 않았겠지만, 신라 입장에선 나름 우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뉴스 속의 한국사] 말 목 베고 헤어진 연인… 넋 위로하려 절 지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