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범 내려올라… 꽹과리 치며 고개 넘었어요
인왕산
- ▲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에 그림책 ‘범 내려온다’에 등장하는 호랑이를 삽입했어요. 인왕제색도는 서울 성곽 서쪽 인왕산을 사실적으로 담아 유명한 작품입니다. 당시 인왕산에 숨어 있던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와서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해요. /문화재청·출판사 아이들판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품 2만3000점이 국가에 기증된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사회에 환원되는 숱한 명품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입니다. 이 그림은 상상 속의 산수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서울 성곽 서쪽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늘 친근하게 바라보는 인왕산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더욱 유명합니다. 풍수지리상 '우(右)백호'에 해당하며 높이가 약 338m인 이 산은 조선시대 역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산이랍니다.
일주일 만에 쫓겨난 왕비와 치마바위
"저, 저… 바위를 덮고 있는 저 치마는!"
조선 11대 임금 중종(재위 1506~1544)은 즉위 초 경복궁 경회루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궁궐에서도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인왕산의 한 바위 위에 웬 분홍색 치마가 덮여 있었는데, 그것이 누구의 치마였는지 금세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폭군으로 알려진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을 쫓아낸 사건이 1506년의 중종반정입니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어머니가 다른 동생)인 중종의 왕비는 단경왕후 신씨였습니다.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연산군 때 좌의정에 오른 신수근이었는데, 중종반정에 가담하자는 제의를 거절했다가 반정 때 죄인으로 몰려 살해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단경왕후는 왕비가 된 지 일주일 만에 쫓겨났죠.
폐비가 된 단경왕후는 인왕산 자락 죽동궁이란 곳에서 살았는데, 중종은 궁궐에서 망연히 그곳을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고 해요. 이를 전해 들은 단경왕후는 '나를 잊지 마소서'라는 뜻으로 자신이 궁중에서 입던 치마를 그곳에 덮어놓아 임금의 눈에 띄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후 단경왕후를 다시 왕비로 모시는 문제 때문에 정치적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복위를 주장한 쪽엔 사림파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 조광조도 있었습니다. 비운의 주인공인 단경왕후는 죽은 지 182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년)이 돼서야 다시 왕비로 인정받을 수 있었어요.
범 내려온다, 꽹과리를 울려라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는 속담이 있어요. 힘이 센 장사를 곧잘 '인왕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죠. 북악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호랑이가 이 산에 숨어 있다가 한양 도성으로 심심찮게 내려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에 '인왕산 호랑이'는 수백 년 동안 공포의 대상이 됐어요. '어명을 받은 어떤 관리가 인왕산 중턱에서 늙은 스님으로 변신한 호랑이를 만나 호통을 쳐 압록강 건너편으로 쫓아냈다'는 설화도 있고, 어떤 설화에선 그 관리가 서울 관악구 출신으로 알려진 고려시대의 강감찬 장군이었다고도 합니다.
간 큰 인왕산 호랑이는 임금이 사는 궁궐 안으로 침입하기도 했습니다. 1405년(태종 5년) 호랑이가 경복궁 담을 넘어 근정전 뜰까지 들어간 사건이 발생했고, 1464년(세조 10년)엔 창덕궁 후원을 휘젓고 다녔다고 합니다. 인왕산 서쪽 자락 무악재를 지나는 사람들은 10명씩 모인 뒤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꽹과리를 치면서 넘었다고 하는데, 호랑이가 곧잘 나타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비율이 지금 교통사고 사망자의 비율보다 높았을 것이란 학자도 있죠. 하지만 사람들의 사냥과 먹이 감소로 인해 서울의 호랑이는 점차 줄어들어 1868년(고종 5년) 다섯 마리가 잡혔다는 실록의 기록과 함께 자취를 감췄습니다. 공식 기록상 한반도 남쪽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4년 강원 횡성에서 잡혔다고 합니다.
김동인 소설'광화사'에 등장해요
인왕산은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깊은 산골의 산처럼 많은 기암괴석과 암벽이 있어 경치가 훌륭합니다. 그래서 인왕산을 그린 산수화가 많이 나왔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이번에 국가에 기증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입니다. 조선 후기 우리나라 자연을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화 중에서도 단연 걸작으로 손꼽히는데, 한여름 소나기에 젖은 인왕산 바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죠. 서울 화동 정독도서관 마당에 가면 겸재가 인왕산을 보고 이 그림을 그렸을 만한 곳에 '인왕제색도비'가 있는데요, 실제 인왕산과 그림 속 인왕산을 비교하며 얼마나 그림을 잘 그렸는지 체험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가 사라진 20세기에 인왕산은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 코스가 됐습니다. 소설가 김동인은 1935년 소설 '광화사'에서 "식후의 산보로서 이러한 유수한(깊숙하고 그윽한) 심산(깊은 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으로 보아서 서울에 비길 도회가 세계에 어디 다시 있으랴"라며 인왕산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소설 속 작가는 인왕산 샘물을 보며 '광화사'의 스토리를 구상합니다. 인왕산은 1968년 청와대 경호 문제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는데, 25년 만인 1993년에 다시 개방됐습니다.
☞인왕산의 한자 표기
인왕산은 한자로 '仁王山' 또는 '仁旺山'으로 쓰다가 지금은 '仁王山'을 공식 표기로 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속설 중에 '원래 仁王山이었던 이름을 일제가 강제로 仁旺山으로 바꿨다'는 게 있습니다. '旺'이란 글자를 풀면 '일왕(日王)'이 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중 '영조실록' 1762년 5월 26일 기록에 이미 '仁旺山'이란 표기가 나오기 때문이죠. 조선 후기에도 '仁王'과 '仁旺'의 두 가지 표기를 모두 썼다는 얘기가 됩니다. 실제로 두 표기는 일제강점기에도 혼용돼 쓰였습니다. 또 '일왕'은 일본에선 공식 명칭도 아니기 때문에 일제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바꿨다고 보기는 무리입니다. '旺'은 '왕성하다'는 뜻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숱한 인명과 지명에 등장하는 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