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삼각형 구도'에 안정적인 가족 이미지 담았어요
가족을 그린 그림
- ▲ 그림1 - 배운성 ‘가족도’, 1930~1935, 캔버스에 유채. /문화재청
5월은 '가정의 달'이에요. 가족이 행복한 건 나와 아주 가까이 있어서 굳이 내 마음을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알아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한 가족도 많아요. 겉으론 화목한 듯 하지만 알고 보면 사이가 벌어진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최근 30년 가까이 부부 또는 사업가로서 동반자의 길을 걸어온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부부가 이혼을 공식 선언하면서 안타까움을 불렀죠.
인간은 어떤 이유로 혼자 사는 대신 가족 같은 작은 집단을 만들어 모여 살게 됐을까요? 학자들은 불을 사용하면서부터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이게 됐다고 추측합니다. 추위와 짐승을 피해 불을 피웠고, 불에 몸을 녹이고 그 불 위에 사냥해 온 고기를 구워 함께 먹으면서 정이 든 것이지요. 그렇게 끈끈하게 마음으로 이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에 식구(食口)의 개념이 생겨났을 겁니다. 식구란 함께 먹고 살아가는 삶의 동반자들을 뜻하는 말이죠.
유학 시절 한국 식구들 떠올렸어요
〈그림 1〉을 보면 대청마루와 앞마당에 열일곱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나와 있어요. 엄마를 조르는 한 아이만 빼고는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요. 가운데에서 할머니가 손녀를 안고 있고, 그 주위에 아들 부부와 아이들, 삼촌과 고모, 그리고 흰 개도 보여요. 요즘엔 저마다 직업이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양해서 그림처럼 조부모, 부부, 자녀의 3세대가 한집에 살기는 어렵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배운성(1901~1978)은 그림에 등장하는 백인기씨 집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얹혀살았어요. 화면 맨 왼쪽에 서 있는 남자가 화가 자신입니다. 집주인은 배운성을 믿음직스럽게 여겨 아들이 유학 갈 때 함께 따라 보냈어요. '가족도'는 배운성이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며 미술 공부를 하던 시절에 한국에서 함께 살았던 식구들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근대기에 찍은 가족사진 같은 그림이에요. 당시에는 가족사진을 찍을 때 활짝 웃거나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모두 정면을 향해 서서 다소 긴장하고 있었어요. 이 그림은 실제로 가족을 한곳에 모아놓고 그린 게 아니라, 유학 갈 때 가지고 간 개별 사진들을 보면서 한 장의 그림 위에 합해 놓은 것입니다. 배운성은 이 그림을 보면서 외국 생활의 외로움을 달랬을 거예요.
부모 역할 강조하는 18세기에 많이 그렸어요
서양에서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까지 가족 그림이 가족사진을 대신했어요. 특히 18세기에는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과 자녀 교육이 강조되면서 행복한 모습의 이상적인 가족 그림이 자주 그려졌습니다. 한 예로 〈그림 2〉는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미국인 화가 존 싱글턴 코플리(1738~1815)가 자기 가족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앞만 바라보며 경직된 자세로 모여 있는 배운성의 '가족도'와 달리, 서로 친밀해 보이는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화가들은 가족 그림을 그릴 때 삼각형 구도로 그리는 경우가 많아요. 안정적인 가족의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코플리의 그림도 삼각형 안에 인물들이 배치된 것을 볼 수 있어요. 위 꼭지점에는 화가 자신이 있고, 그 아래로 손녀를 안고 있는 인자한 외할아버지가 보여요. 엄마는 사랑스럽게 아이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네요. 이 그림은 전시회 후에 화가의 집 식당 벽난로 위에 걸어 놓아서 식구는 물론 손님들도 잘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는 행복한 가족 이미지였던 것이죠.
행복하지 않은 가족 그림도 있어요
코플리의 그림과 대조적으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드가 드가(1834~1917)가 그린 '벨렐리 가족'〈그림 3〉은 행복한 가족 이미지는 아닙니다. 아무도 웃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두 딸은 삼각형 구도 안에 들어있는데 아버지 혼자 따로 떨어져 있으니까요. 벨렐리 부인은 드가의 고모예요. 드가는 고모 댁에 머무는 동안 이 집의 분위기를 금세 파악하게 됐습니다. 고모부는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어서 늘 집을 비웠고 가족들에게 무심했어요. 그 탓인지 아내와 관계도 냉랭하고 두 딸들도 아빠를 낯설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장면은 벨렐리 부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예요. 남편은 뒤늦게 도착한 듯 상복을 안 입었네요. 아내는 슬픔을 나눌 사람이 없어 눈물을 꾹 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가족이 항상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가정의 달 5월에는 행복을 잃은 가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19세기 말 가족사진 유행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왕이나 사대부의 초상은 많이 그려졌지만, 일반인들은 초상화를 주문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가족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이 때문에 인물화 자체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사진 기술이 들어오면서 가족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사진관만 있었던 조선에 조선인 사진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7년 서화가(書畵家)였던 김규진(1868~1933)이 서울 중구 소공동에 세운 천연당 사진관이에요. 당시 사진관에선 돌이나 회갑, 결혼 등 가족사진이 인기였어요. 당시에는 사진을 인화한 후 변색을 막기 위해 물감 등으로 덧칠을 했는데, 이때 인물 분위기에 맞게 자연스럽게 보정하는 것이 사진사의 중요한 역할이었답니다.
- ▲ 그림2 - 존 싱글턴 코플리 ‘코플리 가족’ 1776~1777, 캔버스에 유채. 3에드가 드가 ‘벨렐리 가족’, 1858~1867, 캔버스에 유채. /위키피디아
- ▲ 그림3 - 에드가 드가 ‘벨렐리 가족’, 1858~1867, 캔버스에 유채.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