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투표율 95.5%… 나라 기틀 세울 의원 198명 처음 뽑았죠

입력 : 2021.05.06 03:30

5·10 총선거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3년 가까이 지난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첫 국회의원 총선이 치러졌어요. 많은 나라들이 한동안 남성에게만 투표할 권리를 줬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남성과 여성 모두 투표권을 가졌습니다. 투표소에서 아이를 업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어요. /국가기록원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3년 가까이 지난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첫 국회의원 총선이 치러졌어요. 많은 나라들이 한동안 남성에게만 투표할 권리를 줬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남성과 여성 모두 투표권을 가졌습니다. 투표소에서 아이를 업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어요. /국가기록원
오는 10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총선인 '5·10 총선거' 73주년이 되는 날이에요. 총선은 국회의원 전부를 한꺼번에 선출하는 선거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보다 석 달 앞선 5월 10일, 헌법을 만들고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한 임기 2년의 제헌(制憲) 국회의원 총선이 이뤄졌답니다.

역대 최고 투표율 기록, 아직 깨지지 않았어요

"조선으로서는 처음 있는 남조선 총선거의 날인 5월 10일, 서울 시내는 한적한 시골거리처럼 하루종일 잠잠한 분위기 속에 투표의 날을 보냈다.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일곱시까지 혹은 학교 혹은 무슨 사무소 등에 설비된 시내 약 730(곳) 투표소에는 투표하러 나온 아낙네, 노인, 젊은이가 한 줄로 늘어서서…."

1948년 5월 11일 조선일보에 보도된 5·10 총선거 날의 상황이에요. 아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여전히 '조선'이라고 불렀던 거죠.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국민이 자기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정치에 처음으로 참여하는 엄숙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투표인으로 등록해야 하는 절차가 있긴 했지만, 투표율은 무려 95.5%로 지금까지 한 번도 깨지지 않은 최고 기록이었어요. '새 나라'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작대기 하나 김아무개올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어요. 그러나 38선이 그어지며 남북이 분단되는 아픔이 이어졌죠. 한반도 문제는 1947년 9월 국제연합(유엔)에 상정됐습니다. 유엔 총회는 '유엔 감시하의 한반도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의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발족했지만 38선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의 반대로 북한에선 활동할 수 없었어요. 위원단은 1948년 2월 '선거가 가능한 지역(38선 남쪽)에서 5월 10일까지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어요.

이렇게 해서 5·10 총선거가 시행됐던 것입니다. 선거권(투표할 수 있는 권리)은 만 21세 이상의 남녀 국민, 피선거권(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될 수 있는 권리)은 만 25세 이상의 남녀 국민이면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을 준다는 것은 지금 보면 이상할 게 없지만, 많은 나라에서 상당 기간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큰 반발 없이 여성 참정권이 인정됐던 것이죠. 다만 일제 치하에서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에겐 피선거권을 주지 않아 친일파의 의회 진출을 차단했습니다.

문제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 한국인의 문맹률(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이 무척 높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1945년 광복 당시 문맹률이 70%가 넘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래서 후보들의 기호를 1·2·3번 같은 숫자 대신 '작대기 하나' '작대기 둘'의 방식으로 표기했습니다. 당시 후보들은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다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작대기 하나 김아무개올시다!"

헌법 제정·첫 대통령 선거 등 막중한 임무 맡아

5·10 총선거로 모두 198명의 제헌의원이 선출됐고, 이들은 대한민국 첫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1948년 12월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이 대다수 한국인의 자유 의사가 표현된 선거로 수립된 정부임을 인정하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결의안을 냈습니다. 5·10 총선거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승인받은 것이죠.

일부에선 '5·10 총선거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오해입니다. 경기 광주에서 출마해 당선된 신익희(1894~1956)는 임시정부의 핵심 직책인 내무총장·법무총장과 의정원 부의장 등을 지냈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승만의 뒤를 이어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을 지냈고, 훗날 야당의 지도자가 돼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자로 출마했으나 안타깝게도 유세 도중 갑자기 숨을 거뒀습니다. 이때 선거의 무효표는 185만 표였는데 대부분 신익희의 이름을 쓴 것이었다고 합니다.

전국 최다 득표자는 서울 성동구에서 4만여 표를 얻어 당선된 지청천(1888~1957)이었습니다.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었죠. '독립군 3대 대첩(큰 승리)'으로 꼽히는 1933년 '대전자령 전투'의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당선된 김도연(1894~1967)은 1919년 3·1 운동보다 앞서 일본에서 일어난 2·8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으로, 뒤에 야당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혁신'을 앞세운 진보 진영의 인사도 있었어요. 인천에서 당선된 조봉암(1898~1959)은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했던 인물로, 광복 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중도 통합 노선을 걸었습니다. 안타깝게도 5·10 총선거에서 여성 입후보자는 없었지만, 1949년 1월 경북 안동의 보궐선거(당선인이 사망 등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다시 뽑기 위해 실시하는 선거)에서 임영신(1899~1977)이 당선돼 제헌국회에 들어갔고, 이로써 대한민국의 첫 여성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투표일은 왜 공휴일이 됐을까]

원래 제헌 국회의원 선거는 1948년 5월 10일보다 하루 앞선 5월 9일 일요일에 치를 예정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일요일은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선거일로 잡기엔 곤란할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날 마침 일식이 있는 날이라는 점도 하루 연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 일식은 달이 해의 일부만 가려 태양 가장자리 부분만 금반지처럼 보이는 '금환일식'이었다고 해요. 당시 많은 국민이 과학 지식이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일식이라는 자연 현상이 자칫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고 합니다. 어쨌든 5월 10일 선거일은 임시공휴일이 됐는데, 이후 대한민국의 투표일(재·보궐 선거 제외)이 공휴일이 되는 결과를 낳았답니다. 하지만 하루 노는 날이 아니라 소중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날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