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병풍 그림 보고 120년 전 궁궐의 잔치 재현했어요

입력 : 2021.04.26 03:30

국립국악원 70주년 기념 공연 '야진연'

지난 8일 서울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야진연 공연 리허설입니다. 달과 별, 은하수 등 궁궐의 밤하늘이 영상으로 펼쳐지고 조선시대 악공들의 연주를 재현했어요. /연합뉴스
지난 8일 서울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야진연 공연 리허설입니다. 달과 별, 은하수 등 궁궐의 밤하늘이 영상으로 펼쳐지고 조선시대 악공들의 연주를 재현했어요. /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120여년 전인 1902년 봄밤 조선의 궁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함녕전에서 잔치가 열렸습니다. 밤하늘에는 별빛이 가득하고 궁궐 앞마당에는 봄꽃 향기가 은은히 퍼졌어요. 이날 잔치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기로소는 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원로들이 친목을 다지는 곳이었어요.

이 잔치를 '야진연(夜進宴)'이라고 하는데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에서 베푸는 잔치를 뜻하는 '진연(進宴)'에 밤을 뜻하는 한자 '야(夜)'를 합한 말입니다. 궁에서 밤에 열린 잔치라는 것이지요. 국립국악원이 최근 이 야진연을 120여년 만에 복원해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

이번 공연은 궁궐의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별과 은하수가 영상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조선시대 악공들의 연주와 궁중무용을 재현했습니다. 나라의 융성과 군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춤인 제수창,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춤인 장생보연지무, 장수를 기원하는 헌선도 등 궁중무용과 궁중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10곡을 선별해 무대에 올렸습니다. 전통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첨단 영상 기술로 관객들에게 새로움을 전한 거예요.

또 고종 황제와 황태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극적인 요소를 가미했는데요. 공연의 첫 장면은 황태자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고종 황제를 배웅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버지가 떠난 길을 따르면서 끝을 맺어요.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 기로소에 들어가겠다는 의미이자 삶의 순환을 상징하는 장면이지요.

원래 기로소 입소 축하 잔치는 크게 3가지로 진행됐어요. 입소 전날 황태자와 신하들이 참여하는 '외진연', 입소 당일 황실 가족과 친인척, 국가에서 작위를 받은 여인들이 참여하는 '내진연' 그리고 그날 밤 황태자와 황제 단둘이 참석하는 '야진연'으로 이뤄졌지요. 성대한 규모의 '내진연'을 마친 날 밤, 황태자는 '야진연'에서 황제에게 조촐히 음식을 대접했어요. 황제에게 술을 한 잔 올리고 그 외에 탕과 반찬, 그리고 차를 나눠 마시며 여러 음악과 궁중 잔치에서 추던 무용을 관람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고종 황제와 황태자를 다룬 장면은 '야진연'만을 따로 무대화한 것이지요.

70세 이상 고위 관료들을 위한 공간

이렇게 성대하게 잔치를 열어 황제의 입소를 축하한 '기로소'는 어떤 곳일까요? 조선에서는 70세 이상의 연로한 고위 문신들을 예의를 지켜 정중하게 대우했어요. 이들의 친목을 위해 설치한 기구의 이름이 바로 기로소였습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기로'는 70세 이상의 벼슬에서 물러난 노인을 가리켰고 단종실록에서는 70세 이상의 정2품 이상 문무관을 뜻했습니다. 기로소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은퇴한 고위 공무원들이 쉬고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요. 기로소는 동시에 퇴직한 고위 관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로소에 입소한다는 건 기로소에 가입한다는 뜻이지요.

연로한 고위 문신들을 대우한 것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부터 시작했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고종 때 문하시랑을 지냈던 최당을 중심으로 기영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문하시랑은 고려시대 최고 관직이었습니다. 또 고려 고종 때 퇴직한 재상들이 만든 모임을 기로회라고 불렀어요. 이런 모임이 발전해 기로소가 된 거예요.

조선시대 태조는 나이 60세가 되던 1394년 70세 이상의 문관에게 땅과 노비 등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후대 왕들에게 노인을 봉양하고 존중하는 전통이 이어졌지요. 1428년 세종은 기로소의 입소 기준을 엄격히 했습니다. 정2품 이상 전·현직 문관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만 들어갈 수 있게 했어요. 정2품 이상은 지금의 장관과 차관 등에 해당하는 직책입니다.

고위 관료로서 최고의 영예

신하들만 기로소에 들어간 건 아니에요. 고종처럼 다른 왕들도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숙종은 59세, 영조와 고종은 각각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갔어요. 문관들의 나이를 70세 이상으로 제한한 대신 왕은 더 어린 나이에 기로소에 입소할 수 있었는데요. 이는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연로한 신하들과 서로 친하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의미였어요. 그래서 조선시대 관리들은 70세까지 장수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겼답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700여명이 기로소에 입소했다고 전해져요.

사실 고종은 기로소 입소 축하 잔치를 망설였다고 해요. 고종실록에 따르면 1901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씨 뿌릴 종자마저 없이 고통스러워하는데 잔치를 벌일 상황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도 선대 왕의 일을 이어받는 전통을 소홀히 할 수 없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야진연'이 기록에 남게 됐고 지금 우리가 그 전통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답니다.

☞임인진연도병

국립국악원은 '임인진연도병'을 바탕으로 이번 공연을 재현했어요. 임인진연도병은 임인년(1902년)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는 잔치의 모습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기록돼 있는 10폭의 병풍입니다. 왕실 잔치에서 어떤 궁중무용과 악기들이 사용됐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지요. 그림을 보면 외진연에는 악공 62명이 동원됐고 내진연에는 악공 58명이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병풍에 그려진 야진연을 보면 궁궐 처마마다 청사초롱이 걸려 있고 악사들 곁에는 초가 밝혀져 있어 그날 밤의 아름다운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답니다.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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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최원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