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독립운동가 김규식 가르치고 이승만 추천서 썼어요

입력 : 2021.04.15 03:30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그래픽=김하경
/그래픽=김하경
지난 5일 서울 연세대학교에 있는 '언더우드 가옥'이 문화재로 등록됐어요. 이 집은 훗날 연세대가 된 연희전문학교의 3대 교장이었던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1890~1951) 박사가 1927년 지었어요. 근대 서양 주택의 양식으로 만들어 보존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언더우드 가문은 우리나라에서 개신교를 선교하고 근대 교육을 펼치는 등 4대(代)에 걸쳐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는데요. 그 시작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1859~1916)였습니다.

생소한 나라, 조선으로 떠났어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3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그는 1883년 미국 뉴저지주 뉴브런즈윅에서 신학교를 다니면서 '인도에 가서 선교 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힌디어와 의학을 공부했어요. 그 무렵 언더우드는 아시아 동쪽에 있는 조선이란 나라가 오래도록 걸어 놓았던 빗장을 풀고 개항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시 생소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가겠다는 서양인은 좀처럼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조선에 가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러면서 "조선 사람들이 뭘 먹고 사는지, 그곳에 병원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건 오직 그곳에 주님을 모르는 천만 명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행용 가방과 타자기 한 대, 사진기 한 대만 가지고 조선으로 떠났어요.

영어·화학 등 근대 교육을 펼쳤어요

언더우드는 1885년 인천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먼저 조선인들에게 근대 교육을 전파했어요.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1886년 훗날 경신학교의 전신이 되는 고아원을 지었습니다. 이듬해엔 한국 최초의 장로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서북 지역 선교 활동에 나섰습니다. 언더우드는 1915년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만들어서 교장에 취임했는데요. 이 학교가 나중에 연희전문학교가 됐어요. 그는 조선에서 생활하면서 만난 조선인들에 대해 "성격이 명랑해 금세 친해지고, 의논할 문제가 있을 때 찬반이 분명하며 새롭게 변해야 할 일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도 전통과 신념 그리고 관습은 철저히 지킨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언더우드는 조선인들의 영어 공부를 위한 책도 썼어요. 그는 영어 문법책 '한영문법'과 영어 사전 '한영영한자전'을 만들었는데요. 우리나라 말에 높임말이 많다는 것에 주목해 '경어법'을 별도로 문법 부문으로 독립해 서술했지요. 언더우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조선에 이렇게 뛰어난 문자가 있었다니요"라며 한글의 우수성에 감탄했다고 해요. 언더우드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온 제임스 게일 목사와 성경 전편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성공했는데요. 게일 목사는 "한국어로 성경을 모두 번역하는 것은 미국에 60층짜리 빌딩을 짓는 것보다 더 거대하고 엄청난 작업이었다"고 말했다고 해요.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 가르쳤어요

언더우드는 한국 근현대사의 많은 주요 인물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가 고아원을 열었을 때, 누군가 영양 부족으로 심하게 여윈 일곱 살 아이를 데리고 와 "선교사님, 이 불쌍한 아이를 맡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부탁했어요. 이 아이는 아버지가 귀양을 갔고 어머니마저 죽어 고아가 된 채로 병과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언더우드는 불쌍한 아이를 거둬 키우고 가르쳤습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일본과 싸운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 되는데요. 바로 김규식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은 청일전쟁 이후 국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서울로 올라와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훗날 경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했습니다.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이 190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워싱턴, 뉴욕, 시카고의 교회 지도자 등에게 추천서를 써준 사람도 언더우드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멸망하기 1년 전인 1909년 한국 청년들에게 "내가 믿고 사랑하는 한국이 독립국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지 않길 바랍니다"라며 용기를 북돋워주기도 했답니다.


[언더우드 4대(代)]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이후 건강 악화로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해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유해는 나중에 서울 양화진으로 옮겨져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언더우드 2세인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는 3·1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계에 알렸고, 연희전문학교 교장 시절엔 최현배·정인보 등 한국학 학자들을 일제에서 보호하는 데 힘썼습니다. 6·25전쟁 때는 미군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3대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원일한·1917~2004)는 6·25 때 해군 대위로 참전해 판문점 정전회담에서 통역을 담당했어요. 연세대 교수와 총장 대행, 한미협회 부회장 등을 지내며 한국의 교육 발전과 한미 우호 증진에 힘썼습니다. 4대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 주니어(원한광·78)는 연세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지금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