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톈안먼 시위대 달랬어요

입력 : 2021.04.14 03:30

자오쯔양

1989년 5월 19일 자오쯔양이 톈안먼 광장에 나와 시위대를 향해 연설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대화의 문은 열려있다”며 호소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1989년 5월 19일 자오쯔양이 톈안먼 광장에 나와 시위대를 향해 연설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대화의 문은 열려있다”며 호소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3~5일은 중국의 '청명(淸明)절' 연휴였습니다. 청명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인데요. 중국의 24절기 가운데 다섯 번째 절기입니다. 중국인들은 청명절이 되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과 조상을 추모해요. 이번 청명절에는 중국에서 '비운의 정치가'로 불렸던 자오쯔양(趙紫陽) 전(前)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유족들이 베이징의 옛집에서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자오쯔양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의 강경 진압을 반대하고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다가 공산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총서기 자리에서 쫓겨난 인물입니다. 이후 그는 200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간 집에 갇혀 대외 활동을 할 수 없었어요. 중국인들은 청명절이면 자오쯔양이 갇혀 있었던 이 집을 찾아 그를 추모했지요. 1989년 중국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고, 중국인들은 왜 자오쯔양을 그리워하고 추모할까요?

군중이 민주화를 요구했어요

1980년대 중국 공산당의 독재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1986년부터 대학생이 중심이 돼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어요. 중국 공산당 보수파들은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방(胡耀邦)을 쫓아냈어요. 후야오방은 당시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이었는데요. 자본주의를 밀어내고 극단적인 사회주의를 주장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을 비판하면서 당시 공산당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고 있었어요.

1989년 후야오방이 심장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려요. 중국인들은 그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감싸다가 정치에서 밀려나 억울하게 죽었다며 동정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베이징대 학생들은 후야오방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그의 죽음이 도화선이 돼 그해 4월 베이징 중앙에 있는 톈안먼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어요. 군중은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당시 중국의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의 사회주의식 개방 정책과 공산당의 부정부패에 실망한 민중들은 공산당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고 민주화를 요구했어요. 군중은 톈안먼 광장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죠. 베이징대 학생들은 단식 투쟁까지 벌였습니다.

시위대를 위로하며 눈물로 호소했죠

이때 자오쯔양이 등장해요. 자오쯔양은 후야오방이 떠나고 덩샤오핑의 후임자로 지명됐었는데요. 그는 중국 정부가 시위대에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대화와 소통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어요. 자오쯔양은 1989년 5월 19일 새벽에 톈안먼 광장을 직접 찾아가 붉은색 확성기를 잡고 시위 참가자들에게 7분간 연설했어요. 그는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말하고 비판하건 가치가 있습니다"며 "대화의 문은 열려 있고 여러분이 제안하는 것을 모두 논의할 수 있습니다"라고 군중을 달랬어요. 그러면서 "여러분은 건강하게 살아서 중국의 현대화를 실현해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해산해달라고 호소했어요. 또 그는 시위대를 걱정하며 단식 투쟁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지요.

하지만 중국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투입한 무력 진압을 결정했고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광장에 전차와 장갑차가 들어오고 총격으로 부상자가 속출했어요. 군중도 지지 않고 군인들을 상대했지만 6월 4일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는 군경에 무력 진압되면서 해산됐어요. 게다가 중국 정부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하고 참가자와 관련 지식인들을 체포하고 억압했어요. 사망자 수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민간인 2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국 정부의 억압으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 부부 등 수많은 지식인이 해외로 망명했답니다.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고 집에 갇혔어요

자오쯔양은 시위대에 강경한 태도를 보인 중국 정부와 달리 시위대를 위로하고 민주화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원 자격을 제외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됐어요. 그리고 집에서 갇혀 지내게 됐는데요. 중국 공산당은 그를 철저하게 감시했지만, 그는 톈안먼 사태와 중국 권력자들에 대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테이프에 녹음해 남겼어요.

재미있는 건, 자오쯔양이 이 테이프를 손자 장난감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아뒀다고 해요. 가족들도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이 테이프가 중요한 건지 몰랐다고 해요. 그를 24시간 밀착 감시했던 공산당 요원들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요. 30분 분량의 이 테이프 덕분에 톈안먼 시위에 대한 회고록인 `국가의 죄수'(the prisoner of the state)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요.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이 사건으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요. 그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행한 민주제도는 완전히 형식에 치우쳐 있고 인민이 주인이 되지 못하며 소수, 심지어 개인이 통치하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이 책은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서 중국 정치인들의 입장 차이와 진압 과정에 대해 상세히 기록돼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답니다.

☞톈안먼 광장

톈안먼 광장은 중국 현대사의 상징입니다. 톈안먼은 명나라 때부터 있었던 중국 황제의 궁궐인 자금성 남쪽 외벽에 있는 문인데요. 그 앞에 거대한 광장이 있어요. 이 광장에서 1919년 항일운동이 일어났고, 1949년 마오쩌둥은 이곳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시위에 앞서 1976년에도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 민주화 시위는 마오쩌둥 정권과 문화대혁명에 저항한 건데요.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이에요. 이 운동에 동원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사상과 낡은 것을 몰아내자며 문화재와 예술품을 파괴했는데,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주요 문화유산을 지켜냈어요. 저우언라이 총리가 1976년 세상을 떠나자 그해 청명절을 맞아 베이징 시민들이 톈안먼 광장에 그를 추모하는 꽃을 놓았어요. 또 시민들은 마오쩌둥과 측근들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광장에 붙였는데요. 중국 정부는 꽃과 대자보를 모두 치워버렸어요. 격분한 학생들이 차에 불을 지르는 등 정부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톈안먼 시위도 결국 무력으로 진압됐답니다.

한 청년이 톈안먼 광장에 진입하는 탱크 행렬을 맨몸으로 막았어요. 이 사진은 중국 민주화 항쟁의 상징적인 장면이 됐어요. /위키피디아
한 청년이 톈안먼 광장에 진입하는 탱크 행렬을 맨몸으로 막았어요. 이 사진은 중국 민주화 항쟁의 상징적인 장면이 됐어요. /위키피디아
윤서원·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최원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