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19세기 英 최고 '아이돌' 시인… 젊음과 반항의 상징이었죠

입력 : 2021.03.15 03:30

조지 고든 바이런

국립발레단이 오는 23일부터 공연 예정인‘해적’의 한 장면. /연합뉴스
국립발레단이 오는 23일부터 공연 예정인‘해적’의 한 장면. /연합뉴스

국립발레단이 올해 첫 공연작으로 '해적'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오는 23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이 작품은 해적 두목 콘라드와 아름다운 아가씨 메도라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이 작품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서사시 '해적'을 토대로 만들었는데요. 바이런은 이 시에서 넘실대는 파도와 거친 생명력을 "짙은 푸른 바다의 기쁜 바닷물에, 우리의 생각은 무한하고 영혼은 자유롭다"고 표현했어요. 바이런은 젊음과 반항의 상징이자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시인이었죠.

19세기 영국 최고의 스타였어요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1788~1824)은 낭만파를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1805년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고, 1807년 첫 번째 시집 '한가한 시간'을 발표했어요. 처음엔 예상과 달리 가혹한 비평이 쏟아졌어요. 그러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유럽과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를 두루 둘러보며 여행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국적인 장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를 썼습니다. 이국적인 배경에 자유와 반항의 정서를 열정적인 언어로 표현했어요. 이 작품이 세상 사람들에게 엄청난 찬사를 받았어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죠. 바이런은 담담하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갑자기 인기를 누리게 된 스타들이 종종 하는 이 말의 원조가 바로 바이런이죠.

바이런의 시는 솔직하고 단순한 게 특징입니다. 바이런은 "나는 절대로 글을 고쳐 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요. 생각나는 대로 적어서 시를 썼다는 거죠. 그렇다 보니 섬세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단순한 표현은 번역을 거쳐도 의미가 많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어요. 솔직한 매력을 보여준 그의 시는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았죠.

조각상 같은 외모에 귀족 출신이었던 바이런은 19세기 영국 최고의 스타였어요. 지금으로 보면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인 '팬덤'을 이끄는 주인공이었죠. 그가 쓴 신작이 나오면 수만 부가 며칠 만에 팔려나갔다고 해요. 런던 사교계에서는 그의 옷차림과 걸음걸이까지 따라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여성이 그를 따라다녔고, 그를 보자마자 기절한 여성들도 있었을 정도였다니 인기가 정말 대단했죠. 선천적 장애로 한쪽 다리가 짧았지만, 바이런은 신체적 결함을 감추기 위해 승마, 수영, 사격 등 체력 단련에 몰두했어요. 그는 외모 관리에도 철저했는데요. 체중 관리를 위해 설사약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딸은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불려요

어딜 가나 화제의 주인공이었던 바이런은 돌연 귀족 출신의 애너벨라 밀뱅크(Annabella Milbanke)와 1815년 1월에 결혼했어요. 당대 최고의 인기남과 결혼한 애너벨라는 그해 12월, 딸 오거스타 에이다(Augusta Ada)를 낳았죠. 하지만 순탄한 듯 보이던 부부 관계는 1년 만에 깨지고 맙니다. 바이런의 방탕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애너벨라는 어린 딸을 데리고 바이런을 떠나요. 엄마 애너벨라는 바이런의 방랑벽을 딸이 물려받을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에이다의 교육에 힘을 쏟았어요. 에이다는 당시 뛰어난 수학자와 과학자를 가정교사로 두고 공부했고, 나중에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초가 되는 수학적 개념을 개발합니다. 그래서 그를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라고 부르죠.

"사탄파 시인의 우두머리" 비판도 받았죠

바이런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지만, 혹독한 비판도 따라다녔습니다. 언어의 압축성이나 비유보다는 일반 대중에게 쉽게 통하는, 직설적인 시를 쓴다는 비판을 받았고 바람둥이였던 그의 사생활도 문제였어요. 같은 시대에 활동한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는 바이런을 '괴물'이라고 불렀고, 잔다르크를 쓴 영국 작가 로버트 사우디는 그를 "사탄파 시인의 우두머리"라고 비판했어요.

1824년 바이런은 36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는데요. 영국 왕과 위인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지만, 시대를 대표했던 시인이었던 바이런은 좋지 않은 평판 때문에 사원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결국 가문의 영지인 뉴스테드의 한 교회에 묻혔고, 한 세기가 더 지난 196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의 시인 묘역으로 이장됐습니다.

[낭만주의]

낭만주의 문학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세했던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한 반(反)작용으로 영국과 독일에서 싹튼 새로운 문학 사조를 의미해요. 문학, 음악, 회화, 건축 등 사회 전반에 영향을 줬습니다. 낭만주의는 기존 질서와 논리에 반항하며 감성의 해방을 주장한 게 특징이죠. 낭만주의 작가들은 인간의 감정과 느낌에 주목했습니다.

한국에서는 1920년에 낭만주의 작가들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시인 홍사용,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시인 이상화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민족이라는 집단의 틀에서 벗어나 개인의 감정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알바니아 의상을 입은 바이런(왼쪽)과 그의 딸 에이다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알바니아 의상을 입은 바이런(왼쪽)과 그의 딸 에이다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최여정·'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최원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