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법학 에세이] 독립운동가 변론한 일본 변호사… 대한민국 건국훈장 받았어요

입력 : 2021.02.17 03:30

후세 다쓰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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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00여 년 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했어요. 일본 수도 한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라 일본 정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관련자를 모두 체포해 재판정에 세웠어요. 이 법정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의 변호사는 "조선 독립은 정당한 요구이며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 것 자체가 위법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습니다.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사진>였죠.

1880년 미야기현에서 태어난 후세 다쓰지는 일본 명문 대학인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불과 스물세 살에 법조인이 됐어요. 일본 최고 엘리트가 된 그는 약한 사람들 돕기를 평생 목표로 삼았어요. 특히 조선인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는데요. 후세 다쓰지는 법관이 되고 나서 '조선 독립운동에 대하여 경의를 표함'이라는 논문을 썼다가 경찰 조사까지 받는 고초를 겪었어요.

조선인 유학생 변호를 자청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1923년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일대를 덮친 규모 7.9의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은 사망자 14만명, 이재민 34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봤어요.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당국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불안을 무마하려 했어요. 일본인들은 죽창과 낫을 들고 다니면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이 약 6000명에 달했어요. 후세 다쓰지는 뜻있는 변호사들을 모아 '자유 법조단'을 구성했어요. 조선인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하는 한편, 학살에 관련된 군경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벌였습니다. 또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엄청난 비극에 사죄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조선일보'에 보내기도 했어요.

후세 다쓰지는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쓴 조선인 박열과 동료들을 무료로 변론했어요. 1926년에는 아예 조선을 방문해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억울하게 땅을 빼앗긴 농민들을 위한 토지 반환 소송도 제기했습니다. 그가 애쓴 대부분의 재판은 당시 우리나라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 제국의 벽에 막혀 아쉽게 패소했지만 독립운동가,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함께 싸워주는 변호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어요. 그래서 후세 다쓰지를 '우리의 변호사'라고 불렀다고 해요.

후세 다쓰지는 일본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어요. 그는 세 번이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끝에 변호사 면허를 완전히 취소당했어요.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변호사 면허를 되찾을 수 있었죠. 해방 후에도 그는 재일 조선인 선거권 운동을 지원했고, 당시 건국을 준비하고 있던 대한민국을 위해 헌법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모아 전달했어요. 그의 노력에 감사하는 뜻으로 2004년 10월 대한민국 정부는 후세 다쓰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줬습니다. 일본인으로는 최초였어요.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