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화폐로 세상 읽기] 270m 달하는 청원서 받아 여성 참정권 이끌어 냈어요

입력 : 2021.02.08 03:30

뉴질랜드 10달러에 그려진 케이트 셰퍼드

뉴질랜드 10달러(약 8210원·사진)에는 케이트 셰퍼드가 그려져 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발행된 지폐에 그려진 여성은 두 명인데요. 20달러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10달러에 있는 케이트 셰퍼드입니다. 셰퍼드는 여성들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여성들이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뉴질랜드는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에서 투표할 권리를 준 국가였죠.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에야 여성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세계화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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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영국에서 태어난 셰퍼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와 함께 뉴질랜드로 이주했어요. 그녀는 뉴질랜드 최초 여성 신문사인 '화이트 리본'에서 일했어요. 글솜씨가 빼어났고, 대중을 설득하는 연설에 능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여성금주연합을 설립한 셰퍼드는 여성들의 술집 종업원 고용 금지와 청소년 술 판매 금지를 청원했습니다. 그러나 뉴질랜드 의회는 셰퍼드와 여성단체 의견을 무시했고, 여성들이 선거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셰퍼드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어요.

셰퍼드는 여성들도 선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9000명 서명을 받아 의회에 청원서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의회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녀는 굴하지 않고 다시 2만여 명 서명을 받아 의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또다시 거부당하자, 1893년 셰퍼드는 3만2000여 명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당시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성인 여성 인구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어요. 이 청원서는 뉴질랜드는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청원서로 길이로 따지면 270m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청원서는 '여성도 법적,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투표권은 남성만의 권리가 아닌 인간의 권리'라는 점을 강조했죠. 이 청원서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어요.

결국 의회는 이 문제를 표결에 부쳤고 1893년 찬성 20, 반대 18로 법안이 통과되면서 여성들도 투표할 권리가 생겼습니다. 이후 1919년 여성도 선거에 출마해 당선될 권리가 주어졌고, 1933년 첫 여성 의원이 탄생했습니다.

2005년 뉴질랜드 한 방송사가 자국의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을 선정했는데 셰퍼드가 2위를 차지했습니다. 2013년에는 뉴질랜드 10대 인물에 선정됐죠. 뉴질랜드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케이트 셰퍼드 신호등'이 있습니다. 파란불이 켜지면 셰퍼드가 모자를 쓰고 걷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뉴질랜드 여성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한 셰퍼드를 기리고 평등과 투표의 의미, 정치 참여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해요.



배원준 세계화폐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