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감정 순화하는 비극 관람을 국가가 장려했어요

입력 : 2021.02.01 03:30

그리스 '비극 경연 대회'

고대 그리스에서는 매년 '비극 경연 대회'가 열렸어요. 이 경연 대회는 기원전 7~8세기에 시작해 기원전 5세기 무렵 도시 국가 아테네에서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인간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죠. 국가는 시민들에게 이 대회를 보도록 장려했습니다. 축제 기간만큼은 가난한 이들도 생업에 시달리지 않고 온종일 연극을 볼 수 있도록 배려했어요. 영웅들이 겪는 고난과 두려움, 역경을 헤치는 과정 등을 보며 시민들이 간접적으로 감정이 정화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이유였죠. 연극 관람은 시민들의 의무와도 같았습니다.

고대 그리스 연극사에 기록된 비극 경연 대회의 첫 우승자는 기원전 534년 대회에 나온 '테스피스'입니다. 그리스 연극에서 '최초의 희곡 작가' '최초의 배우'로 기록된 거죠. 그의 이름을 기려 배우, 연기자를 뜻하는 '테스피안(thespian)'이라는 용어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어요.

비극 경연 대회가 열렸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전경입니다(위). 아크로폴리스 남쪽에는 당시 공연장으로 사용됐던 디오니소스 극장이 유적으로 남아있어요(아래 왼쪽). 비극 경연 대회 첫 우승자인 테스피스는 수레에 의상 등을 실어 여러 도시에 공연하러 다녔다고 해요. 이탈리아 피렌체에 테스피스의 수레를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아래 오른쪽). /위키피디아
비극 경연 대회가 열렸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전경입니다(위). 아크로폴리스 남쪽에는 당시 공연장으로 사용됐던 디오니소스 극장이 유적으로 남아있어요(아래 왼쪽). 비극 경연 대회 첫 우승자인 테스피스는 수레에 의상 등을 실어 여러 도시에 공연하러 다녔다고 해요. 이탈리아 피렌체에 테스피스의 수레를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아래 오른쪽). /위키피디아
도시 공동체의 이익 도모

비극 경연 대회는 어떻게 진행됐을까요? 1년에 한 번, 봄에 열리는 이 대회를 준비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답니다. 한 대회가 끝나는 즉시 아테네의 최고 행정장관(아르콘)이 다음 대회 준비에 들어가는 거죠. 아르콘은 우선 '도시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작품'을 구상하도록 다섯 명의 희극 작가와 세 명의 비극 작가를 선발해요. 이 가운데 희극 작가는 한 편씩, 비극 작가는 네 편씩 연극을 완성해야 했어요. 경연의 성과는 비극에서 판가름 났기 때문에 비극 작가에게 더 큰 비중을 맡겼고, 이름도 '비극 경연 대회'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비극 작가 세 명에게는 돈 많은 후원자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합창대 편성, 의상 제작비 등 공연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댔죠. 당시 후원자들은 유력 가문 출신의 귀족들이 맡았는데 이들을 '코레고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축제에 경비를 지원하는 것을 큰 명예와 기회로 여겼어요. 정치적 야심을 가진 귀족들이 시민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이만한 기회가 없다고 본 거죠.

닷새 동안 성대한 축제

비극 경연 대회가 열리는 절차는 오늘날 축제와 비슷해요. 축제 시작 전, 발표회를 먼저 열어 작품 소개를 했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를 '프로아곤'이라고 불렀답니다. 기원전 406년의 프로아곤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있어요. 축제 전날 밤엔 도시 밖 신전에 모신 술과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 신상을 아크로폴리스로 옮겨요. 축제 기간은 5일이었는데요. 지금도 축제가 시작하는 개막식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당시에도 개막식이 열리는 첫째 날 오전 시민들은 성대한 행렬을 이뤄 극장으로 모여들었어요. 개막식에서는 도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명예로운 시민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에게는 갑옷을 선물했습니다. 극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이들에게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냈죠. 아테네 시민들은 개막식을 통해 단합을 이루고 문화적 자부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시민 10명 중 1명이 참석

개막식 이튿날엔 다섯 편의 희극 작품이, 그리고 나머지 사흘 동안은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비극 경연이 이어졌죠.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에 딸린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신관의 주관하에 열리는 이 국가적인 행사에 당시 시민 1만70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아테네 시민 인구가 가장 많을 때 16만명 정도라고 하니 대단한 인파가 몰린 거죠. 공연이 끝나면 그해 우승자가 누가 될지 이목이 쏠렸어요. 심사는 엄격했습니다. 선발된 심사위원 10명의 이름이 시민 앞에 거명되고 이들은 공정한 심사를 맹세하는 선서를 했어요. 심사 위원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우승자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단지에 넣으면, 아르콘은 이 중 5개를 뽑아서 최종 우승자를 결정했어요.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불멸의 이름을 기록한 스타 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도 이렇게 탄생하게 됐답니다.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최원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