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차 한 잔에 부처 진리 있다"… '茶의 성인'으로 불렸죠

입력 : 2021.01.21 03:30

초의선사

최근 국립광주박물관이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으로부터 초의(草衣·1786~1866) 선사(승려의 높임말)와 관련된 고문서 등 169건을 기증받았다고 해요. 초의선사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분인데, '다성'이란 '차(茶)의 성인(聖人)'이란 뜻이죠.

물에 빠진 소년, 스님으로 거듭나다

"악! 살려주세요."

1790년(정조 14년), 전라도 무안의 한 개울가에서 다섯 살 남자아이가 급류에 떠내려가고 있었어요. 물놀이를 하다가 그만 물살에 휩쓸려버린 것이죠. 마침 지나가던 스님 한 사람이 물에 뛰어들어 소년을 건져냈어요.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이 소년에게 스님은 이렇게 권했어요. "얘야, 출가하면 어떻겠느냐." 출가는 집을 떠나 스님이 되는 것을 의미해요.

삶과 죽음이 한순간의 일이라는 걸 알게 된 소년은 그로부터 10년 후 15세 때 남평 운흥사에 들어가 승려가 됐어요. 19세 때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초의는 이 무렵 영암 월출산에 올라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요.
/그림=김영석
/그림=김영석

초의선사는 학문에 두루 통달했고 시와 그림에도 빼어난 솜씨를 보였습니다. 24세 때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 정약용을 만났는데, 다산도 그의 학식에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초의는 '선문사변만어' 등의 책을 써서 선(禪) 사상을 담아냈는데, 선이란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히 생각하는 일을 말해요. 그는 선과 불교의 교리인 교(敎) 사이에서 치우침이 없이 수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림으로는 대흥사의 '천수천안관음보살도'를 그렸고, 사대부와 교유하면서 지은 시를 모은 '일지암시고'도 남겼습니다. 명성이 알려진 뒤 초의는 대흥사 동쪽 계곡에 일지암을 짓고 40년 동안 진리를 찾아 정진했다고 해요.

한국 차의 우수성 칭송

초의선사는 50대 초반에 한국 차 문화의 대표적 저술이라 일컬어지는 '동다송'을 썼습니다. 차나무의 생태와 차 만드는 방법 같은 풍부한 지식을 시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죠. 특히 우리나라의 차 6종을 소개하며 한국 차의 우수성을 칭송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차를 마시는 다도(茶道·차를 달이거나 마실 때의 방식이나 예의범절)를 전파하려고 했어요.

초의의 사상 중 중요한 것이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인데요. 차 한 잔 속에 부처님의 진리와 명상에서 얻는 기쁨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차 한 잔으로 티끌이나 먼지가 없는 순수한 기운을 마시는 것이거늘, 어찌 큰 도(道)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느냐"고 말했어요.

초의와 추사의 눈물겨운 우정

초의와 교유했던 당대 조선의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동갑내기 벗이었던 추사 김정희(1786~1856)였어요. 조선 서예의 최고봉인 '추사체'로 유명한 추사는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오랜 제주도 유배 생활을 했고, 그런 상황에서 아내를 여의기까지 했습니다.

1843년 봄, 일지암에 있던 초의는 추사를 위로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유배지를 찾았습니다. 두 사람은 반년 동안 한 집에 기거하며 같은 이불을 덮고 잤다고 해요. 초의가 돌아갈 때 추사는 "산중에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느냐"며 어린애처럼 보채며 붙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지암으로 돌아가던 초의는 말을 잘못 타서 살이 벗겨지는 사고를 당했어요. 이 소식을 들은 추사는 초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볼깃살이 벗겨져나가는 쓰라림을 겪고 있다니 자못 염려가 되네. 크게 상처를 입지나 않았는가. 그러게 내 말을 듣지 않고…. 사슴 가죽을 아주 얇게 조각내 쌀밥 풀로 붙이면 제일 좋다고 하네. 그건 중의 가죽이 사슴 가죽과 통하는 데가 있기 때문이지. 그걸 붙이고서 곧장 몸을 일으켜 꼭 돌아와야 하네."

편지 중에서 어느 부분이 농담인지 눈치챘나요? 서로 허물없는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악의 없는 농담 속에서, 친구를 염려하는 마음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리워하는 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초의는 81세가 되던 해 대흥사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한 자세로 입적(승려가 죽음)했습니다. 불교와 차 문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최원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