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화폐로 세상 읽기] 42년간 강압 통치한 독재자… 피살된 후 국민들이 "얼굴 보기 싫다"며 지폐서 빼
리비아 50디나르와 카다피
카다피는 1942년 가난한 유목민 부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63년 리비아대학에서 공부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리비아는 국왕이 통치하는 국가였는데, 카다피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왕이 통치하는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952년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혁명을 통해 왕을 퇴위시키고 토지개혁을 시행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는 등 변화를 가져온 것을 동경했습니다. 결국 카다피는 졸업 후 1969년 육군 중위 신분으로 동료 장교들과 함께 리비아 수도를 기습 공격하는 쿠데타를 감행했어요. 국왕을 퇴위시키고 27세 나이에 스스로 리비아 국가원수에 올랐죠.
- ▲ /세계화폐연구소
그는 집권 초기 국가원수·총리·국방장관을 겸임했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외치며 미국과 영국의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식민지 시절부터 거주하던 이탈리아 사람들을 강제 추방했습니다. 그리고 석유 회사를 비롯한 도로·항만·항공 등 국가 기반 시설을 국유화했어요. 이후 대규모 유전 개발과 국토 개발 사업을 추진해 아프리카 빈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석유 고갈에 대비해 자급자족이 가능한 첨단 농업 국가를 구상했어요. 1984년 농업 지대를 만들기 위한 대수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남부 사하라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북부 지중해 해안에 있는 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로였죠. 총 길이가 4000㎞가 넘는 거대한 물 통로를 사막을 가로질러 지하에 묻는 공사였습니다. 카다피는 석유 수입을 국민에게 분배하는 복지정책을 펼쳤습니다. 교육·의료 전면 무상 정책을 내세웠는데, 해외 유학비까지 국가가 부담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카다피는 폭력적, 강압적 수단을 써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는 철권 통치로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 그는 반체제, 테러 단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이라고 비판하며 경제제재를 시행했습니다. 1992년부터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까지 나섰죠. 리비아는 원유 수출을 봉쇄당해 경제 상황이 악화했습니다. 독재에 대한 반발도 심해졌죠.
2011년 카다피의 장기 독재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시위를 일으켰고, 카다피 군대는 시위대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발사해버렸습니다. 국제사회는 카다피 정권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고, 유엔 다국적군이 리비아 공습에 나섰습니다. 이후 시민군에 체포된 카다피는 2011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리비아 국민은 "카다피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며 50디나르 지폐 디자인 변경을 요구했고 2013년 카다피는 지폐에서도 퇴출됐습니다.